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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아버지1편

어제 간호사에게 아버지 상태가 더 안 좋아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드님이시죠. 아버님 상태가 더 안 좋아지셨어요.”
간호사의 설명은 친절했지만 내용은 불안했다. 생명의 불꽃이 점점 시들어 가고 있다는 짧은 통화였다.
전화를 받고 사무실에서 나와 걸었다. 갑자기 몰려온 찬바람이 얼굴에 달려들었다.
아버지는 꽤 오랜 기간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셨다. 그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식구들 중에 아무도 없었다.
“언제였을까?”라고 가족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자면서 소리를 지를 때부터였다"고도 했고,
팔이 올라가지 않았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니냐고 하기도 했다.

사실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본다고 해도 정확한 대답을 얻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도 그 시작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김제 조씨 집성촌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한학을 공부했던 분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는데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불타버린 오래된 집에 한문으로 된 고서들이 가득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글을 읽기는 읽으셨던 모양이다.

집을 벗어나면 온통 사방이 논뿐인 곳이었고,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곡식이 익을 때면 어른들은 황금 들판이라 했다.
벼가 익기 전에는 아득한 푸른 들판과 하늘이 맞닿아 있어 마치 바다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사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무렵에 고향을 떠나셨다.
멀리 함안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작은아버지 공장에 일을 하러 떠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야 다시 돌아오셨다.
그러니까 나에게 아버지는 상시 ‘부재중’인 전화기와 비슷한 분이셨다.
농번기나 명절에 오시면 해태 종합 과자 선물 세트 같은 것을 들고 오셨는데, 그
래서 그런지 아버지의 향기는 바나나킥과 비슷하기도 하고 새우깡 같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 아버지가 계신 함안에 간 적이 있다.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에 갔었다.
아버지는 공장 옆에 있는 집에서 자취를 하고 계셨던 것 같다. 자취방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세를 놓기 위해 만든 집이 아니라,
공장 옆 시골집의 한 귀퉁이 방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은 기울어져 있었고 마당 앞에는 펌프로 물을 끌어 올리는 수돗가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집 귀퉁이 방에 기거하고 계셨다.
“여기가 아버지 방일까?”
방문을 열어 보니 벽 옷걸이에 옷 서너 벌이 걸려 있었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땀에 찌든 옷에서 나는 냄새와 오래된 장판, 벽지가 뿜어내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훅 하고 나를 덮쳤다.
똥지게를 퍼 나르던 나의 가난한 시골 살이 경험으로도 익숙지 않은 불편함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방문을 열고 나오니 한여름의 열기가 시멘트 바닥을 달구어 더욱 뜨겁게 다가왔다.
나는 수돗가 세면대 위에 있던 면도칼로 내 손을 그어 버렸다. 아마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자해, 아니 혈서였을 것이다.


​아버지2편 부조리(不條理, Absurdity)

마루에 놓여 있던 달력 조각이 보였다. 철 지난 달력 종이도 아껴서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철 지난 달력은 메모지가 되거나, 가난한 집의 한지 대신 문창지가 되기도 했고, 연을 만드는 한지를 대신하기도 했다.
나는 누런 달력 조각에 이렇게 썼다.
부조리하다.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고,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징용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옆집 할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하고 그 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자 할머니까지 화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부모가 없는 고아 상태로 지내야 했다. 큰아버지는 부산으로,
작은아버지들은 함안으로, 또 다른 분은 하와이에서 트럭 기사로 일했다.
아버지가 동생 밑에서 일하게 된 것은 ‘노풍’이라는 벼 때문이었다.
1978년이 박정희 정부는 노풍벼를 대대적으로 심기 시작했다.
노풍벼는 말 그대로 바람에 강한 통일벼 품종의 하나였고 이전 통일벼 보다 수확량이 더 많았다.
정부는 재래종보다 수확량이 월등히 많은 다수확 품종인 노풍벼를 적극 권장했다.
논에 다른 품종을 심으면 일부러 모자리를 갈아엎어 버렸다. 당시 군수나 면장 등 지방 관리들에게 품종 보급률은 곧 인사 고과였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농가마다 할당량을 정해 강요했다.
부는 노풍벼가 도열병에 강하다고 했지만 그 반대였다. 그해 유례없는 도열병이 창궐했다.
벼들이 누렇게 죽어갔다. 가을이 되자 농민들이 수확할 것이 없었다.
박정희 개발독재 국가 대한민국이 농민들에게 가한 테러나 마찬가지였다.

“통일벼를 심지 않으면 공무원들이 장화를 신고 와서 못자리를 밟아버리는 거여.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예 매국노 취급을 하면서 윽박지르고….” -당시 농민 인터뷰

정부에 잘 보이려는 공무원들의 행패로 많은 농민이 그해 겨울을 버틸 식량마저 거둘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아버지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농사꾼에서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내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농부가 땅을 떠났다. 그때 농촌을 떠난 인구 70만 명중 아버지도 그 한 명이 되었다.
일을 마치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자취방에 도착했다.
손가락에선 아직 피가 멈추지 않았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웬 피냐?”
“아들 다쳤어?”
“이리 와 봐라.” 삼촌은 차에서 천 조각을 가져와 피가 나는 손가락을 꼭 싸맸다.
피가 하얀 천 위로 붉게 퍼져 나갔다.
“안 아파?”
“네.”
나는 혈서를 쓴 종이를 주머니에 서둘러 구겨 넣었다.
“왜 다쳤어?”
“장난치다가 조금 다쳤어요.”
“조심하지.”
그해 여름, 나는 세상의 절반을 이해하게 되었다.
근면, 성실, 정직은 가난한 사람이 지켜야 할 규범이 아니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에게 요구하는 규율이었다.
공장에서 근면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해서 돈을 벌어다 주고, 거기다 성실하게 일하고 정직하라는 것은
자신들의 부를 탐하지 말라는 지배자의 논리처럼 보였다.
부조리한 세상이었다.


아버지3편 하와이와 바나나


1965년 개정된 미국의 새로운 이민법 덕분에 한국인의 미국 이민이 급증하던 시기였다.
특히 숙련공 중심의 취업 이민이 활발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직종이 바로 '대형 트럭 운전사'였다.

당시 미국은 물류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장거리 대형 트럭(Trailer) 운전사가 만성적으로 부족했다.
반면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통해 대형 차량 운전 경험이 풍부한 인력이 많았다.
당시 한국에서 트럭 기사는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직종으로 인식되었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그 바람을 타고 하와이로 트럭 운전을 하러 떠나셨다.
당시 나는 일고여덟 살 아니면 그보다 몇 살 더 어렸을 무렵이라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하와이 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아마 한국에서도 트럭 기사를 하셨던 모양이다.
작은아버지가 나에게 준 선물은 세 가지다.

첫 번째 선물은 바나나다.

작은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시며 세 가지 선물을 챙겨 오셨다. 그 첫 번째가 바나나였다.
그 당시만 해도 바나나는 아주 귀한 과일이었다. 과일이라면 수박, 참외, 사과, 감이 전부였던 시절,
삼촌이 가져온 바나나의 달콤함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내가 지금도 바나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기억 때문일 것이다.
달달함과 부드러움, 그 달콤함은 어떤 선물보다 강렬했다.

두 번째는 커피였다.
바나나도 그렇고 커피도 그렇고, 이것이 국내에서 구입한 것인지 하와이에서
직접 가져온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병에 든 커피였는데 꽤 오랫동안 먹지 않아
커피가 눅눅하게 굳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 때 집에 돌아와 찬장을 열어보면, 각진 유리병 안에 검은색 커피가 들어 있었다.
습기를 머금어 굳어버린 탓에 쉽게 떠지지 않았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용해 열심히 파내면 숟가락의 3분의 1쯤 겨우 떠낼 수 있었다.
거기에 설탕을 듬뿍 넣고 열심히 휘저으면 검은 커피가 완성되었다.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그 맛은 어린 나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꽤 자주 그 짓을 했고, 병 바닥이 거의 드러날 무렵 나는 중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커피를 즐겨 마셨던 셈이다.
"야, 너는 그 쓴 게 맛있다고 자꾸 먹냐?"라고 묻던 동네 친구들에게도 한 잔씩 타주던 기억이 난다.

세 번째 선물은 대형 튜브였다.
김제에는 넓은 들이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논인데, 논에는 물이 필수다.
그 물은 섬진강 다목적 댐에서 흘러오는 수로였는데
우리는 이걸 대똘이라고 불렀다. 물이 참 맑고 깨끗했다.

여름이 되면 내내 그 물가에서 살다시피 했고, 삼촌이 가져온 대형 튜브는 당연히 동네에서 인기 만점이었다.
여름이 오면 동네 형들이 여럿 모여 튜브에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대형 튜브는 차량용이라 자전거 펌프와는 입구가 맞지 않았다.
형들은 모나미 볼펜을 개조해 어댑터를 만들어 끼우고 바람을 넣었다.

공기가 아주 조금씩 들어갔기에 바람을 가득 채우는 데만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바람을 빵빵하게 채운 튜브를 물에 던져놓고, 5~6명이 튜브에 매달려
동네 끝 지점에서 옆 동네 끝 지점까지 떠내려가곤 했다. 요즘 말로 하면 '튜빙'이다.
물 깊이가 내 키를 훌쩍 넘었기 때문에 튜브를 놓치면 큰일 날 수도 있었지만, 겁 없던 나는 그 튜브를 타고 꽤 멀리까지 가곤 했다.

시간이 흘러 튜브는 여기저기 구멍이 났고, 몇 년이 지나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커피도, 바나나도, 튜브도 그렇게 유년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삼촌도 결혼하여 함안과 부산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사셨다.

대형 트럭 기사였던 삼촌은 지금 통근 버스 기사를 하고 계신다.
곧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아직 운전대를 잡고 계신다. 나에게 세 가지 선물을 남겨주신 삼촌은,
내가 그 선물들을 여전히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 모르실 것 같다.



아버지4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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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며칠 전 첫눈이 내렸다. 잔설이 아파트 계단 돌틈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군데군데 새벽에 얼어붙은 눈과 녹은 눈들이 남아 있었다.
출입문을 나오자마자 찬 바람이 이때다 싶어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주차장으로 달려가 은색 봉고차에 시동을 걸었다.
30만 km에 가까운 디젤차의 덜덜거리는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아들, 어디냐?”
“전주예요.”
“빨리 와 봐라.”
“무슨 일인데요?”
“아빠가 이틀 전부터 배가 아프다는데 이상하다.”
“네.”

전주에서 김제 방향으로 핸들을 틀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전주에서 김제는 30분이면 도착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우리 집은 거기서 다시 부안 방향으로 10리쯤 더 가야 한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벽에 기대어 계셨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배가 아파 병원에 갔는데 소화제와 진통제만 처방받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약효는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나는 아버지를 차에 태웠다. 김제시에 있는 내과를 찾아갔다.

“어디가 아프세요?”
“배가 아파요.”
“언제부터 아프셨나요?”
“한 2~3일 된 것 같아요.”
“어떻게 아프시죠?”
“쿡쿡 쑤시고, 소화가 안 되는지 배가 불러오고….”

의사는 익숙한 증상이라는 듯 배가 아프다는 말만 듣고는 다시 소화제와 진통제를 처방했다.

어머니 말씀으론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크게 아픈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죽어가는 자식을 업고 10리 길을 달려가 병원에서 어렵게 진료를 받았다고 하셨다.
"태어나길 위가 약하게 태어난 아기입니다." 의사는 어머니에게 이 말 했다고 한다.
그 의사의 말이 맞았는지 그 이후로 나는 배가 자주 아팠다.

툭하면 체했다. 그래서 항상 가방에 바늘을 가지고 다녔다. 체하면 스스로 엄지손가락을 찔렀다.
아마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바늘이 없으면 볼펜 스프링을 폈다.

칼처럼 날카로운 부분으로 손을 찔렀고, 그러고 나면 속이 편해졌다.
그게 아니면 약국에서 소화제를 사 먹었다.
체하든 배가 아프든 그런 건 보통 하루 이틀이면 좋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3일 동안이나 계속 아프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읍내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읍내에 좀 괜찮은 병원 없냐?”
친구가 문방구 옆에 있는 의원이 그래도 좀 낫더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 병원에 가서 다시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초음파 장비로 아버지의 배를 살폈다.

“빨리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가세요. 최대한 빨리요!”
“무슨 일이죠?”
“아마도 배에 피가 가득 찬 것 같아요.”
“네?!”

아버지는 식은땀을 흘리며 거의 정신을 못 차리고 계셨다.
이미 이 병원에 들어올 때부터 기력이 하나도 없으셨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김제 병원으로 향했다.
그나마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고 수술이 가능한 병원은 거기밖에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에 피가 가득 찼다고 합니다!”
의사는 아버지의 상태를 보더니 바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 주세요.”
복잡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이 문구만은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수술 시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음]
나는 “네”라고 답하며 서명을 했고, 아버지는 수술실로 들어가셨다.

감기에 걸려 학교에 가지 못한 여학생, 배가 아픈 남자,
어깨가 아픈 노인들로 월요일 오전의 병원 로비는 인산인해였다.
그 안에는 수술실로 들어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나도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의사가 스테인리스 양동이에 담긴, 아버지에게서 떼어낸 장기를 내게 보여주었다.
“쓸개가 찢어져서 배 안에 피가 가득했습니다. 어디서 다치신 것 아닌가요?”

그제야 아버지가 지난 금요일, 회사에서 일을 하다 다쳐 일찍 퇴근하셨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수술대 위에 실려 수술실 밖으로 나오셨다.

회복실로 옮겨지고 시간이 흐르자 아버지가 마취에서 깨어나셨다.
“아버지, 괜찮아요?”
그 순간, 아버지가 내 목덜미를 쥐고 흔들며 소리치셨다.
“이놈아, 네가 날 죽이려고…!”
극심한 고통 때문인지 아버지는 몸부림치기 시작하셨다. 나는 급히 간호사에게 달려갔다.

“마취에서 깨어나서 통증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무통 주사를 놓아 드릴까요? 이건 비급여라서 비용이 좀 듭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니 빨리 놓아 주세요!”

무통 주사를 맞고 나서야 아버지는 고통이 가라앉은 듯 깊은 잠에 빠져드셨다.


아버지5편산재

20여 명이 입원해 있던 큰 병실 창가에 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창문 너머, 잎이 다 떨어진 느티나무 잔가지들이 찬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겨울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지지대가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경남에 있던 쌀통 공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주말에는 농사일을 하고,
평일에는 김제에 있는 전기회사에서 전봇대를 세우는 일을 하셨다.
병실에서 정신이 든 아버지께 여쭤보니, 지난 금요일 회사 트럭 짐칸에 올라 다른 현장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고 하셨다.
갑자기 끼어든 차 때문에 트럭이 급정거를 했고, 그때 아버지는 배를 장비에 크게 부딪혔다.
그 통증 때문에 금요일에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셨던 것이다.

결국 그 사고로 장기가 파열되어 출혈이 시작됐고, 배가 점점 불러온 것이었다.
“쓸개가 원래 이렇게 크지 않습니다. 정상보다 대여섯 배는 부어올랐다고 보시면 됩니다.
붓다 못해 터져버린 거죠.” 의사가 스테인리스 쟁반에 담아 보여주었던 아버지의 찢어진 쓸개가 다시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가 알려준 번호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지난주에 저희 아버지가 그 회사에서 일하다 다치셨습니다.
지금 수술받고 입원 중이십니다.”
“아, 네. 그렇습니까?”

전화를 받은 담당자는 이미 사고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저희가 적당히 조치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일과가 끝난 저녁, 아버지를 찾아가니 회사 담당자와 사장이 다녀갔다고 하셨다.
병원비 일체를 회사에서 부담하기로 했다는 말에 아버지는 무척 편안한 얼굴이셨다.
“다행이네요.”
“그래, 다행이다.”

아버지는 당장의 병원비 걱정을 덜어 마음이 놓이신 듯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 일을 못 하시는 동안의 생활비는 어디서 받으시게요?”
“어…?”
“내가 일을 못 하니 당연히 못 받는 것 아니냐.”
“아니죠. 회사에서 일을 하다 다치셨으니 산재 처리를 해야죠.
일 못한 날짜만큼 휴업급여를 받는 게 맞습니다.”

“야, 그래도 오랫동안 근무한 회사인데…
부장이 산재 처리하면 공사 수주받기 어려워진다고 사정 좀 봐달라더라.”
"그냥 공상처리 하자고 하더라"
[공상처리(公傷處理)란 노동자가 업무 중 부상을 당했을 때,
산재보험법에 따라 국가(근로복지공단)를 거치지 않고 회사와 노동자가 직접 합의하여 치료비와 보상금을 처리하는 것을 말함]
“아뇨, 아버지는 이제 그런 험한 일 못 하세요.
그리고 사정을 봐줘야 할 쪽은 회사가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나는 곧바로 회사를 찾아갔다.
“산재 처리해 주시죠.”
“아니, 아버님 본인이 괜찮다고 하셨는데….”
“아닙니다. 그건 아버지가 잘 모르고 하신 말씀이고요.
장기를 떼어내고 배를 이만큼이나 갈랐는데, 나중에 후유증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회사 입장에서도 골치 아파지기 전에 깔끔하게 산재 처리해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회사 측은 내 단호한 태도를 보고 그냥 넘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산재 처리를 해주었다.
덕분에 입원 기간의 급여와 후유장해 보상금 3천만 원, 그리고 수술 부위 재발 시 다시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

아버지는 수술 후 정확히 6개월 뒤, 수술 부위 통증으로 다시 입원해 한 달을 보내고 퇴원하셨다.
그 이후로는 다시 회사에 나가지 못하셨다. 그때 받은 보상금 3천만 원으로 아궁이가 있던 옛집을 지금의 모습으로 고쳤다.
아버지는 가끔 이 집을 볼 때마다 “이 집은 네가 지은 것이나 다름없다”며 그때 일을 칭찬하시곤 했다.

그날 사고를 당해 수술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지금 다시 병상에 누워 계신다.
이제는 의식이 없는 채로….


아버지 6편 장례

장례를 마치고 구례 집에 오니
매화가 활짝 피어 달콤한 향기가 마당에 가득했다.
아버지를 땅으로 돌려보내고 고향집으로 돌아왔을 때,
고향집 마당에 아버지가 건강했을 때 심었던 매화는
이제 겨우 꽃봉오리가 커지고 있었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대파 모종이 3일 동안 말라 죽었을 것 같다며 하우스 안에 파종한 대파 씨를 살폈다.
다행히 대파 씨앗들은 멀쩡했고,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로 물 조리를 들어 대파에 물을 흠뻑 뿌렸다.
"재수 없는 놈이 한겨울에 죽으려나 보네!
이런 이야기하셨다고 어머니가 말했었다.
1월 말에 아버지가 저혈당 쇼크로 쓰러지던 날, 형은 2월 초에 수술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북대 응급실 의사는 담백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오늘 돌아가시는 것인가 하는 생각과
곧 수술하는 형 없이 장례를 치러야 하냐는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아버지 한 달만 기다리세요."
형은 요양병원으로 옮기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던 아버지의 귀에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엄마가 말해주었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꼭 한 달을 버티다 형이 회복하고 첫 출근을 한 그 주에 돌아가셨다.
정읍 화장장에서 장례식장 버스를 타고
김제 선영으로 가는데 태인면이 보였다.
아버지가 내 아들보다 조금 나이가 많았을 때 소몰이꾼을 했다고 한다.
소를 팔러 가던 장이 바로 여기 태인 장이었다.
소를 팔러 가던 청년 아버지는 어떤 꿈이 있었을까?
버스가 부안 쪽으로 가다가 김제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부량면 벽골제를 넘어 입석 마을에서 좌회전해서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선산에 도착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한가운데 오목하게 올라온, 산이라고 하기엔 너무 낮은 곳에 나무 몇 그루만 있는 야산.
그곳도 오래전 이 동네 전설적인 술꾼이 술을 먹고 불을 질러
그나마 있던 나무들도 모두 불타고 몇 그루 남지 않은 그 산에 아버지를 모셨다.
아버지는 다리가 조금 불편해지자 선산에 땅을 깎아 평평하게 만든 다음,
돌을 가득 채우고 경계석을 세워 본인이 들어갈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두셨다.
500만 원이 들었다고 했다.
"야, 돈 모자라면 이야기해라. 장례식비를 계산하러 가던
때 어머니가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천만 원을 모아 두셨다."
장례 비용이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몇 년 동안 저축해서
천만 원을 장례 비용으로 쓰라고 모아 두셨다.
본인을 위해서는 단돈 10만 원도 쉽게 쓰지 못하셨던 분이....
"아가야, 돈을 아껴야 한다."
아버지는 아내에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평생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았던
아버지가 유일하게 생을 지탱하게 만든 것이 오직 절약뿐이었기 때문이다.
장례식 마지막 날,
서울에 살던 친구가 문상을 왔다.
동네에서 함께 자란 친구였다.
"태용아 미안하다, 너무 늦었다."
"오늘따라 일이 늦게 끝났어."
야, 압구정동에서 늦을까 봐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게 달렸다."
"그래, 야 일부러 연락도 안 했는데 이렇게 왔어. 힘든데."
"야, 아니다…. 고향 친군데."
"그래, 고맙다."
친구는 어머니와 형, 그리고 누나에게 연신 인사를 하더니
허겁지겁 밥과 수육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야, 천천히 먹어. 체한다."
"일 끝나고 바로 왔더니 배가 너무 고프다. 꼭 먹으러 온 것 같다."
그렇게 허겁지겁 밥을 먹던 친구는 앉은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미안하다, 나 올라가 봐야겠다.
내일 아침에 일찍 현장에 나가봐야 해서….
아니 내가 미안하다."
"아녀..."
친구와 함께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 바람이 훅하게 불어왔다.
장례식장에서 빌려입은 헐렁한 상복 사이로 찬 바람이 불어
몸이 오그라 들었다.
친구는 차에서 담배를 꺼내 왔다.
담뱃갑에서 레종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친구는 담배 연기를 연신 깊게 빨더니 천천히 내뱉었다.
담배 연기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야, 담배라도 천천히 펴라."
"그래…."친구는 웃으면서 대답했는데 골목을 뛰어놀던 그때 그 어릴 적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웃는 것 우는 것은 어릴 때와 별 차이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야. 네 아버지 고생 엄청나게 하셨다.
너는 학교 다닌다고 잘 몰랐지?
내가 네 아버지랑 같이 일했잖아.
그게 일당을 많이 주는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더라고.
나도 노가 다 좀 해봤는데 그거 상노가다다.
네 아버지가 자식들 대학 보내느라
그 힘든 일을 그렇게 오래 하신 것 아니냐.
야, 나는 힘들어서 보름 하고 그만뒀다."
"그랬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10여 년을 그 힘든 일을 해서 자식 넷을 대학에 보냈다.
그리고 오늘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정말 재수 없는 분이었을까?
구례로 돌아오는데 3일 동안 잠을 못 자 그런지 차에서 자꾸 졸음이 왔다.
오수 휴게소에 들렀다. 차를 주차하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논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자전거 옆에 끼워진 삽,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던 나.
아버지는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
"야,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되던 날, 꿈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참 돌아다녔는데 집을 못 찾았다고 하더라."
어머니는 아버지가 쓰러지던 전북대 병원에서 꿈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는 지금쯤 새로운 집을 찾으셨을까?
구례 집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비워진 집에 가득 나무 냄새가 났다.
"아들 고생했네, 집도 짓고."
집을 짓고 처음 오셨을 때 뿌듯하게 바라보던 아버지 모습이 생각난다.
평생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 험한 소리,
욕 한번 하지 않았던, 착하고 선하셨던 아버지….
3일 내내 나지 않던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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