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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거래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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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긴 겨울을 이겨내고 자란 푸른 보리밭에 봄바람이 불었고, 전주와 군산에 지리하게 심어진 벚꽃이 줄지어 피었다.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우주에서 보면 100리 벚꽃길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이리에서 군산으로 이어진 기차를 타기 위해 나는 이리역에서 기차표를 구했다. 군산에서 장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기차는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리에서 군산은 사실 지척이라 기차가 출발하면 금세 도착하는 거리였다. 

임피와 대아를 지난 기차는 곧 군산역에 도착했다.


군산역을 걸어 나오면 곧 선착장이었다. 장항으로 가는 배는 수시로 있어 길게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바다 건너 눈앞의 장항제련소에서 하얀 연기가 길게 뿜어져 이리 쪽으로 흘러갔다.


멀리 금강하구둑의 모습이 보였다. 금강은 말 그대로 금빛이 흐르는 아름다운 강이다. 발원지는 진안의 뜸봉샘이다. 

한 줄기는 섬진강으로 가고 한 줄기는 금강으로 이어진다. 섬진강은 진안, 임실, 남원을 지나 남해로 흘러가고 금강은 충청도를 크게 휘돌아 

다시 호남의 군산으로 흘러온다. 멀리 돌고 돌았지만 결국 시작한 호남에서 끝난다.


맑았던 금강은 군산 갯벌의 뻘물이 밀물에 밀려 탁류가 된다. 채만식은 맑고 고운 물이 세속에 빠져 탁류가 된다고 했다. 

가방을 들고 장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짭조름한 짠내가 훅 하고 밀려왔다. 

포구 선창가에 길게 늘어선 술집 여자들의 향수 같거나 일꾼들이 찾는 여관의 싸구려 스킨 같은 진하고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배에 올라타자 아침 장사를 끝내고 장항으로 돌아가는 아주머니들의 장터 이야기로 배는 왁자지껄했다.


배낭을 메고 장항으로 넘어가 기차를 타려고 하는 여행객들이 보였다. 그중에 혼자서 작은 배낭을 메고 있는, 

내 나이로 보이는 여자도 보였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가 궁금해해야 할 이유가 없지만 배에서 딱히 생각할 것도 없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아직 그 연유를 다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배는 곧 장항 선착장에 도착했다.


나는 잡생각은 집어치우고 곧장 장항역으로 향했다. 뒤를 힐끔 쳐다보니 그 여자도 나와 함께 장항역으로 걷고 있었다. 

기차는 이리 기차가 도착하고 배를 타고 넘어오면 탈 수 있도록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 도착하자마자 곧 출발했다.


기차라고 해봐야 서너 량에 불과해서 그랬는지 그 여자는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앉자마자 그녀는 배낭에서 책을 꺼내 보고 있었다. 채만식의 《탁류》였다. 초봉이처럼 예쁜 여자였다. 

한마디 해볼까 하고 나의 방정맞은 입술이 근질거렸다. 소설을 읽었다고 잘난 척이라도 하면서 말이라도 건네 볼까 했지만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서 잠시 생각만 하고 창밖을 봤다.


기차는 서해안의 리아스식 해변을 따라가며 힐끔힐끔 서해 바다를 보여 주었다. 

기차는 곧 보령역에 도착했다. 내가 보령에 온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펜팔을 했던 여자아이 때문이었다. 

보령여고를 다녔다는 그 여자아이가 한번 보자고 했고, 마침 할 일도 없어 가보겠다고 한 것이 겨울이 끝나는 2월쯤이었다.


“벚꽃이 필 때쯤 가볼게.”


봄이 왔고 벚꽃이 피었고 나는 그 약속을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기차역에 내리자 그 여자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편지로는 꽤 길게 연락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재미로 보낸 편지들이었고, 

사실 이렇게 만나기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편지 속에서 꽤 친한 친구처럼 글을 썼지만 막상 만나보니 그 어색함이라는 것은, 

남자라고는 만나 본 적도 없이 맞선을 나온 시골 처자와 산골 남자처럼 서로의 얼굴에 역력했다.


“와줘서 고마워.”

“그래.. 오랜만..”

“아니, 얼굴 본 것은 처음이구나..”

“그러게.”


사실 오래전 고등학교 다닐 때 서로의 사진을 보낸 적이 있지만 

그때뿐이었고, 지금은 이제 그 시절의 학생도 아니었다. 여자아이는 그 사진 속의 발랄함이 없어 보였다. 

내가 그 아이와 펜팔을 시작한 것은 가요책 뒷페이지에 있던 '펜팔 구함'이라는 잡지 속의 주소를 보고 심심해서 보낸 편지에 그 아이가 답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간 편지가 꽤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그 여자아이도 이렇게 만나기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왜 만나자고 했을까?


사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답장을 제대로 한 적도 없었다. 한 번 보면 좋겠다고 쓴 편지의 우울함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그래, 무슨 일이야?”라고 서둘러 묻고 싶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금방 꺼내고 나면 미안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보령은 어디가 좋아? 지난번에 대천에 MT 온 적이 있었는데 바다가 좋던데.” 사실 올 초에 학교에서 대천으로 MT를 온 적이 있었다.

“전화하지 그랬어…”

“아, 함께 온 사람들이 많아서…”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나.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전화번호를 알려준 것 같다. “전화해”라고 했지만 나는 한 번도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대학 입학한 것 축하해.”

“무슨 축해야, 기껏해야 지방대인걸… 너는 재수하는 거야? 공부도 잘했잖아. 억울하게 떨어졌네…”

“뭐 어쩔 수 없지.. 다 내 팔자지.”


우리는 대천으로 가는 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버스는 곧 대천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보였다. 대천 해변은 한 사람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라도 걷다 보면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해변으로 내려갔다. 바다에는 놀러 온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걷자…”

“그래.”

“근데 무슨 일로…”


나는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연인 사이도 아니고 굳이 만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그냥.. 한번 보고 싶었어. 서울 가기 전에 내 고향에서.”

“서울에는 왜? 재수하러 가는 거야?”

“아니야, 나 취직했어..”

“취직.. 왜 대학에 안 가고. 그러게, 그냥 공부하기도 싫고 대학도 싫고, 집에서 재수하라고 하는데 다 귀찮아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사이에. 나보다 공부도 잘했는데…. 나는 달의 인력으로 끌려가는 바닷물을 보며 그 아이가 어떤 일로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보통 이런 경우의 수는 몇 가지가 안 된다. 첫째 집안의 몰락, 둘째 부담감과 주위의 시선 그리고 가족의 눈초리, 셋째 공부가 싫어서 하는 일시적인 방황. 이 아이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해줘야지, 라고 머릿속으로 이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다.


“야, 너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나는 그 아이의 말에 뭐라고 해야 할지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너 내가 왜 재수를 하지 않고 서울에 가겠다고 했는지 그게 궁금해서 그렇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 아니야… 그냥 공부가 더 하기 싫어……”

“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맞네. 사실 공부가 싫다고 하면 뭐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내가 너보다 공부를 잘했으면 모를까 공부도 못한 주제에 조언을 하기는 그렇고, 그래도 그렇게 공부를 잘했는데 한번 실패했다고 그만두는 게 맞는 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지쳤어? 전교 1등이 그러면 되나… 아니면 전교 1등이라서 그런 거야? 나는 그런 점수를 맞아 본 적도 없어 잘 모르겠다.”


나는 그 아이에게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대학에 가면 소개팅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꽤 재밌게 보낼 수 있다는 시시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아이도 그 정도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을 것 같다.


“그래, 그러면 네 맘대로 해야지. 내가 뭐라고 너에게 조언을 하겠니.. 오늘은 바다나 실컷 보고 가야겠다.”


우리는 썰물이 끝나고 밀물이 올라오는 밤까지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 이제 가봐야겠는데.. 너무 늦었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면…”


사실 생각보다 예쁜 그녀에게 고백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서울까지 가는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어디 싸구려 여인숙이라도 알아봐야 할 참이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바닷가 근처의 여인숙을 찾아봤다. 가장 저렴한 방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뒤지다가 7천 원짜리 방을 하나 구했다. 

가방을 던져두고 세면장에 가서 늦은 세수를 했다. 하루 종일 바닷가를 돌아다녀서 그런지 운동화는 젖어 있었다. 

신발에 달라붙은 모래가 세면장으로 흘러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쓰고 버려둔 녹슨 면도기, 그리고 분홍색 알비누, 말라비틀어져 갈라진 빨래비누가 보였다.


세수를 하고 세면장을 걸어 나오는데 기차에서 봤던 여자가 보였다. 나는 애써 그 여자 얼굴을 외면하고 방으로 들어와 따뜻한 방에 몸을 던졌다. 

피곤함이 밀려왔다. 주인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방문 사이 벌어진 틈으로 찬바람과 함께 들어왔다. 곧 옆방의 문이 열렸다. 

배낭을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을 닫는 소리가…. 나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 바다는 저녁 바다보다 활기차 보였다. 어제 쏟아낸 우리들의 이야기들은 밤새 파도와 함께 멀리 흘러가 버렸다. 

여인숙을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른함과 상쾌함이 함께 들어왔다 나갔다.


바다로 나가는 계단에 기차 안에서 봤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불 좀 주시겠어요?”

“아, 네.”


나는 주머니에서 서둘러 라이터를 꺼냈다.


“여기요.”


나는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파르르 떨리는 가느다란 장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기, 어제 기차에서 봤죠?”

“저요?”

“네. 배에서도 보고…”


나는 내심 힐끗힐끗 몇 번 봤던 것이 들킨 것 같아 정수리가 뜨끈했다.


“사실 이리에서부터였어요. 그쪽이랑 저랑 함께 온 것이…”

“아…”

“제 앞에서 기차표를 끊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같은 기차표를 샀어요. 군산역에 처음 가봤고 장항에 가길래 저도 따라왔어요.”

“왜요?”

“그럼 여인숙도요?”

“아뇨… 그건 그냥 우연히…”

“그런데 그 여자친구분은 어디 갔어요? 미인이던데요.”

“아.. 여자친구는 아니고요. 그냥 펜팔 친구….”

“펜팔이요? 생각보다 순진한 아저씨네요.”


그녀는 담배를 입안에서 말아 돌리더니 후하고 불었다. 담배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뭐 하는 여자일까? 

나는 다시 그 여자의 모습을 살폈다. 뭐 때문에 나를 따라온 것일까? 아니면 그냥 우연히 심심해서….


“왜요.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쑥스럽게. 제가 스토커라도 되는 줄 아시나 봐요.”

“뭐, 제가 그 정도 인물은 아니라서… 하하.”


웃고 있었지만 수상하기는 했다.


“아저씨, 아니 학생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아침이나 함께 먹으러 가요. 제가 살게요.”

“뭐 그럽시다.”


우리는 해변가의 저렴해 보이는 전주식당에 갔다.


“두 사람, 연인 사이인가 봐요? 좋을 시절이구만.. 부러워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장님이 농을 던졌다.


“아뇨…”

“맞아요.”


그 여자는 처음 본 나와 연인 사이라 말했는데, 거짓말이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항변한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기 때문이다. 

콩나물국밥을 먹고 우린 다시 해변에 나왔다. '맞아요'라고 말한 이후로 나는 잠시 엉뚱하게 그녀와 연인이기라도 한 상상을 해봤다. 나는 그녀와 다시 해변으로 나왔다.


“저는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요. 뭐 함께 가시겠어요, 아니면 여기 있을 것인가요?”

“왜요, 그 여자라도 만나시게요?”

“아뇨. 이제 집에 가야죠. 학교도 가야 하고….. 할 일도 없는데 대천 바다에 이틀이나 있기도 싫고요.”


나는 여인숙에 가서 가방을 꺼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요, 그럼 가세요. 저는 여기 좀 더 있을게요.”


그녀는 별말 없이 바닷가로 향했다.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버스, 기차, 배를 타고 다시 이리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에 오르기 전에 그녀(펜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이제 이리로 가고 있어…”

“서울 잘 가고 연락해라…”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녀는 곧 서울에 취직을 했다고 했다.

 큰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벚꽃이 피면 가끔 편지를 보냈다. 나도 가끔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는 점점 그녀를 잊었다. 

그녀의 편지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대천 바다에서 이야기했던 그녀(기차 안의 여자)는 왜 나를 따라왔을까? 나는 가끔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두 명의 여자는 그렇게 나의 머릿속에 대천, 군산, 기차와 함께 박제되었다.


제대 후 취업한 나는 뉴스에서 2009년을 마지막으로 군산~장항 간의 배가 100년이 넘는 역사를 끝으로 멈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군산항을 찾았다. 마지막 배에 탄 사람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 다시 장항으로 넘어가 기차를 탔다. 

그리고 홀린 듯 보령을 지나 대천을 찾았다.


바닷가에 도착하자 “전화하지 그랬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오래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녀의 어머니는 나에게 그녀의 새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나야..”

“오랜만이야..”


그녀는 아직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대천에 와서..”


그녀는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었고 결혼을 했다고 했다.


“잠깐만, 아이가 울고 있어서…”


나는 못할 전화를 한 듯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가 온 것은 대천에서 돌아오고 난 며칠 후였다. 

그녀는 그때 우리를 따라다니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는 여자친구가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모르는 여자며 그날 처음 본 여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랬구나.. 모르는 여자였구나.. 나는 네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물어볼 걸… 그랬어…”


그녀의 전화 목소리가 떨렸다.


전화가 끊어지고 나는 한동안 그날을 생각했다. 머릿속이 금강의 물처럼 혼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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