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 소설] 나쁜 남자 나쁜 여자
아무래도 병에 걸린 것 같다. 이 병은 꽤 오래되었는데 치유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병원에 가도, 용하다는 사람을 만나도 이 병이 낫는다는 보장을 하지 못했다.
당사자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인데도 병원도 지인도 모두 도움이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운동을 하면 어떠냐고 해서 큰맘 먹고 러닝화를 구입했다. 매일 달리면 좋아질 거란다.
그렇게 시작해서 이제 풀코스까지 뛰고 있지만 병은 호전될 기미가 없다. 오히려 얼굴에 기미만 끼고 있다.
이 병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하기사 의사도, 약사도, 운동도 치료하지 못한 병이니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구는 또 여행을 가보면 어떠냐고 해서 스카이스캐너라는 어플로 매일 항공권을 검색하고 있지만,
인도는 여행 난이도가 높고, 일본은 너무 가깝고, 대만은 덥고, 중국은 말이 안 통해서 싫고,
동남아도 더워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이것도 갔다 오면 오히려 병이 깊어질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먹어보면 어떠냐고 직원이 말해줘서 맛집 탐방도 해봤다.
유명 돈카츠 맛집이라고 가보니 사람이 너무 많다. 겨우 기다려서 먹어보니 동네에서 파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독일에서 빵을 배운 사람이 만든 빵집에 빵이 맛있다는 곳에 가보니 여기도 줄이 500미터다.
더위에 쓰러질 것 같아 기다리다 지쳐서 포기하고 프랜차이즈 빵집에 가서 몇 개를 집어 들고 왔다.
산에 가보라는 지인도 있었다. 그래서 지리산 종주를 했다. 화엄사, 노고단, 벽소령을 지나
장터목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에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봤다.
모두 3대가 덕을 쌓아야 보일 정도의 장관이라고 했다. 멋지기는 했다.
멀리 남해에서 붉은 쇳물처럼 흐물거리는 해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일순간 좋아졌다.
다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하면 상대방이 좋아할까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은 내가 알 바는 아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바람처럼 들어왔다 사라졌다.
다시 장터목에 돌아왔다. 산을 내려와서 술 한 잔을 하면 기가 막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도토리묵을 시키고 막걸리를 시켜 한 잔했다.
기가 막힐 정도는 아니지만 달달하니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병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뭘 해야 하나,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이젠 조용히 잠들고 싶었다.
숨겨둔 사진 하나가 생각났다. 먼지 묻은 상자를 꺼냈고, 그 안에 방치되어 있던 사진이 왜 떠오른 것일까?
사진 속에 어색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웃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사진에 몇 년도에 찍은 것이라는 부분이 희미해져 잘 보이지도 않는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한때는 전부라고 생각했고 없으면 못 살 것 같았지만, 없어도 수십 년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
그러니까 그 사진의 주인공은 여자다.
아마 다 그렇게 예상했을 것이다. 친구 사진일 수도 있지만 이쯤에서 아무래도 여자 사진이 낫다.
아무튼 스무 살로 보이는 여자다.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긴 머리를 하지는 않았다.
뭐 생머리에 긴 머리, 청바지에 티셔츠, 뭐 이런 여자를 생각했다면 오해다.
그런 여자 아니고 단발머리에 짧은 치마에 블라우스, 뭐 이런 여자도 아니다. 그냥 여자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가 마지막이었다. 하기사 여자가 있을 리 없다.
뭘 해도 심심한 내가 무슨 수로 여자를 웃기고 대화를 하고 하겠는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자다. 예쁘지도 않다.
멀뚱한 키에 단발머리, 어디서 구해 입었는지 알 수 없이 부조리한 옷차림.
이를테면 기지 바지에 면티 같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몸매는 좋은가? 알 수 없다.
아무튼 그런 여자다.
무색무취, 패션 테러리스트… 이름이 뭐였을까?
생각이 안 나야 정상인데 생각이 난다.
유명한 여배우와 이름이 같다. 이런 경우 대략 난감이다.
망각이 되어야 하는데 자꾸 생각이 나버린다.
이 사진을 찾은 이유도 망할 놈의 영화 때문이다.
이 여자와 같은 이름의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개봉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데, 20년 만에 주연을 맡았다며 같은 이름의 여자배우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중년 배우였던 배우는 이제 노인 역할을 하고 있다.
노인 여자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라면 필시 크게 히트하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걸 하는 영화사와 제작자, 감독이 있었다.
이런 경우 시나리오부터 탈락하는 것이 다반사인데 어디서 돈을 받아서 제작했을까 하는 생각이 나기는 했다.
그 여자… 사진 그래, 그 여자 사진 말이다. 배경이 어딘지 생각났다.
바닷가다. 바다 어디지?
변산인가, 경포대, 부산? 그럴 리가 없다. 남해인가… 여수… 아니다,
가본 기억이 없다. 어디야… 생각이 안 난다. 부안 어디인 것 같다.
그래, 가난해서 노을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해서 생각났다.
그리고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꽃다발, 프리지아였다.
'칵테일 사랑'이라는 노래에 빠져서 프리지아 꽃다발을 건넨 기억이 난다. 그
래, 갑자기 다 기억이 난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거리를 거닐다가…' 뭐 이런 노래였는데,
그 여자 사람하고도 거리를 걷고 프리지아도 주었다.
그런데 사진은 왜 찍었지?
무슨 날이었다. 카메라도 없었는데… 기억이 정말 안 난다.
부고 문자가 왔다. 누군가 또 죽었다.
하기사 매일 죽는다.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것은 죽는 것이다"라고 누가 말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유의지를 상실하는 방법이다.
인간은 태어나고자 하지 않았고 그냥 현실의 상황에 던져진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냥 던져지고 주어진 운명을 살아간다.
누구는 부자로, 누구는 가난하게, 누구는 학자로, 누구는 농부로, 누구는 백수로 산다.
왜 그냥 던져져서 선택하다 보니 뽑기를 잘못했다.
한 번 잘못 뽑히면 바꿀 수 없다. 욕해도 필요 없다. 그냥 한 번으로 끝이고 방법이 없으니 그냥 살다 죽는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커다란 주차장에 커다란 차들이 빼곡하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친구가 반갑게 맞아준다.
반가울 일인가 싶다. 평소 한 번도 못 본 친구의 아버지에게 절을 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잘 가셨어요, 아니면 잘 가세요, 명복을 봅니다,
뭐 이런 말을 마음속으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혀… 양말에 구멍은 없나, 아니면 엉덩이가 이상해 보이지는 않나,
허리띠는 제대로 채웠나, 절하고 몇 초 있다가 일어서야지…
2초는 너무 짧고 5초는 긴가, 아니면 10초? 앞에 알람이 있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절을 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앞에 있는 전자 모형 인형이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인형도 절을 한다.
절을 하고 보면 앞에 인형도 절을 하고 그 안에 초시계가 있다. 10초가 지나면 인형도 일어난다.
그럼 인형과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반복. 절을 하는 동안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맞절을 하고 손을 잡았다. 어색했다. 무슨 손까지…
식탁에 앉자마자 도우미 여사들이 와서 밥을 먹을 것이냐고 물었다.
네… 왔으니 밥값은 아니구나, 배가 고프다. 밥이 오자 친구도 왔다.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생각이 나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한다. 어찌 아냐고 했더니 그 사진을 자기가 찍었다고 한다.
뭐 이렇게 되어야 자연스럽다. 이 친구 녀석이 사진을 찍었다고 해두자.
그래서 사진 속의 장소를 물었더니 동해란다. 동해… 왜 동해…
생각도 없는데 아무튼 동해라고 했다. 모임에서 동해를 갔고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런 것이겠지.
친구는 또 성실하게 그 여자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는데, 길고 긴 이야기라 생략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결론은 동해였고, 나는 그 이후로 그 여자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랬다. 그 이후에 그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 여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 여자가 딴 남자가 좋다고 나를 차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기분이 별로다. 차일 것이라고 미리 알 수 있다면 좋을 것을. 먼저 차버리거나 아니면 도망이라도 갈 것을…
그 여자에게 차이고 돌아오는 길, 포플러 나무 가로수가 생각났다. 반짝이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고 느꼈던 그 바람이 생각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포플러 나무 아래'라는 노래도 기억난다.
그래, 다 기억난다. 차이고 나면 그렇게 센치해지고 뭐든 머리에 팍팍 박히게 되는데 기억 못 하고 있었을까?
다 그 이름 같은 여자 배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외국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또 그 오래된 감독이 마지막 영화라고
그 배우를 캐스팅하지만 않았다면 기억나지도 않았을 것인데. 인생에 우연은 없다더니 몇 개의 우연 때문에
그 사진을 들고 장례식장까지 갔다.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닌데…
친구와 장례식장 밖으로 나와 담배 하나를 피웠다. 담배도 끊었던 것 같은데 녀석은 다시 피우고 있었다.
웬 담배냐고 물었더니 세상이 쉽지 않아서 다시 시작하기 쉬운 담배를 다시 시작했다고 했다.
뭐 얼마나 산다고 하고 싶은 것을 미루면서 살 필요는 없다.
담배에 술에 맘껏 했던 친구 아버지는 90도 넘기셨고, 담배 술 안 하던 내 아버지는 50도 못 되어 돌아가셨다.
박복한 사람이다. 50이면 너무 젊은 나이인데 그리 급히 갈 일인가 싶다. 친구는 그 여자 아이에 대해 정보를 준다.
뭐 이렇게 쉽다고?
그럴 리가 있는가, 친구 녀석도 장소만 알 뿐 아무것도 몰랐다.
동해로 갔다. 사진 찍은 장소, 빨간 등대가 보인다.
아, 사진 속의 등대다. 보면 뭐 하나, 바다는 그대로고 파도는 높고 항구에 일 못 나간 배들이 가득하다.
영수, 스카이, 하늘, 미자, 훈이 뭐 이런 이름들의 배다. 동해니까 오징어, 대게 잡는 배일 것 같다.
새벽 바다엔 사람이 없다. 하기사 풍랑주의보가 내린 바다에 뭐 하려고 나와서 돌아다니겠는가.
비도 오는데 차에서 나가기도 싫다. 배가 고파서 구글 리뷰를 검색했다. 댓글이 많고 아침에 문을 여는 식당을 검색했다.
'전주식당 콩나물국밥', 이 상호는 없는 곳이 없는 것 같다.
아침엔 콩나물국밥이 언제부터 기준이 되었나.
하기사 오래전에 전주 삼백집이라는 곳에서 콩나물국밥을 먹은 기억이 날아온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이 날씨에도 사람이 꽤 있다. 역시 구글은 신이다.
콩나물국밥이 9천 원이었다. 3천 원짜리 국밥이 9천 원이 되었는데 내용물은 더 형편없는 것 같다.
그래도 간이 맞고 추운 날엔 이만한 것이 없다. 비 그친 바다로 나왔다.
멀리 꼬맹이들 몇 명이 바다 근처에 있다. 뭐 하려고 그러고 있나 싶어 봤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동해 바다에서 뭐 하고 있는 것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 가봐야겠다.
차를 몰고 고향에 갔다. 집은 텅 비었다. 아무도 없다. 빈집으로 둔 지 20년,
진작 팔았어야 했는데 미련하게 가지고 있었다.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그래, 편지가 있다. 내가 다 보내지 못했고 그녀가 보낸 편지 몇 통. 노란 고무줄로 묶기에도 빈약한 편지들.
선배 안녕. 잘 지내요? 저는 잘 지내요. 미안해요. 이렇게 되어서, 선배 잘못은 아니에요. 제가 나쁜 여자예요.
그래, 나쁜 여자다. 그녀가 보낸 마지막 주소로 차를 몰았다. 고향 집에서 2시간 거리다.
그녀의 부모님은 식당을 했었다. 식당은 그대로다. 이름도 같다. 그녀의 이름이다.
잊을 수도 없게 같은 이름의 식당을 아직도 하고 있다.
식당에 들어갔다. 점심을 시켰다. 밥이 나왔다.
벽을 두리번거렸다. 그 여자의 사진이 보인다. 아이와 함께 있다. 잘 사는 것 같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그 여자가 보인다. 아이와 함께 있다. 힐끔 본다.
볼 수도 있지, 알아보지는 못할 것 같다. 애써 외면하고 그 여자와 아이 사이에서 멀어져 간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발걸음이 멀어진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와 멀어질수록 그녀에 대한 기억이 더 생생해진다.
차 문을 열고 발을 넣고 의자에 앉고 시동을 건다.
역시 나쁜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