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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2003년 1월
일본 우에노역앞
어쩌다가 일본말 한 마디
못하는 내가 일본에 일하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일본에서 일하던 팀이 갑자기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우리회사가 만들던 프로그램은
휴대폰에 바코드를 전송해서
이걸 이용해 쿠폰이나 회원권 그리고 모바일 머니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한 번은 사용해봤을 것 같은 서비스지만 이 시점이 2001년에서 2003년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당시엔 아주 혁신적인 서비스였고 누구나 욕심을 가질 만한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일본에 있던 팀은 아이템을 가지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일종의 구원 투수 겸 해결사로 파견되었다.
나는 우에노역앞 아사쿠사 뷰 호텔에 머물렀다. 아침에 주로 우에노와 아사쿠사 주변을 달렸다.
일본어도 못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2편 그 해 겨울

2001년 겨울 나는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찬바람이 부는 나리타 공항엔 이부장이 나와 있었다.
그는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일본 뉴커머라고 부르는 90년대에 이민을 와서 정착한 유학생이었다.
우선 회사는 일본통이 통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일본통을 뽑아야 했다.
나는 일본어도 못하고 일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책으로 배운 것뿐이었다.
“조팀장님 잘 오셨습니다.”
이부장은 178정도 되는 키에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자신을 도쿄에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검은색 닛산 엑스트레일에 나를 태웠다.
“나리타에서 도쿄는 얼마나 걸리나요?”
“대충 한 시간 정도입니다.”
그는 나를 긴시쵸의 작은 비지니스 호텔에 내려주었다.
“내일 아침에 오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하고 떠났다.
아주 작은 비즈니스 호텔이었다.
나는 여기에 6일을 머물렀다.
다음날 내가 간 사무실은 호텔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일본에 한국 드라마를 더빙에서 판매하는 회사였다.
일본 전역에 한국 상품점에 비디오를 납품한다고 한다.
방 하나가 모두 비디오 복제를 하는 곳이었다.
매일 한국 드라마가 여기서 더빙되어서 전국에 배포된다고 하니 한류 열풍의 시작이 이 회사에서 시작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날 밤 그는 나를 오다이바의 레인보우브리지에 데리고 갔다.
오다이바의 해변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도쿄의 밤풍경과 레인 보우 브리지 그리고 자유의 여신상이 보였다.
이부장님 우리가 할 수 있기는 할까요?
일본팀이 모두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가능 한 것일까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나 나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3편 "그해 봄"

우리가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한국엔 아직 바코드를 표시할 수 있는 휴대폰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가까운 일본은 휴대폰에 바코드를 표시하는 것이 가능했다.
더구나 문자 메세지를 보내는 사람이 돈을 내는 한국과는 다르게 일본은 보내는
사람을 돈을 내지 않고 수신하는 사람이 제목을 보고 나서 수신하면 돈을 내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보내는 사람을 시스템 사용 비용만 지불하면 메시지는 얼마든지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가지로 우리가 사업을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단지 이 시스템을 누가 구입하냐가 문제다.
일본에서 보낸 6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별일 없이 아침에 출근해서 점심 먹고 사무실에서 잠시 일하다가 호텔에 가고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일본에서 보낸 6일을 보내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돌아와 바로 일본어가 가능하고 일본에서 생활이 가능한 직원을 채용했다.
그렇게 나는 그를 채용했다.

3-4명의 면접을 봤는데 그가 가장 일본어를 잘했다. 더구나 이미 일본 기업과 일해본 경험이 있었다.
일본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바로 일본으로 떠날 수 있는 직원이 필요했다.
나보다 3살 어린 강대리는 부산 출신이었다. 대학 전공은 일본어가 아니었지만 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했고
일본에서 위킹비자로 1년을 일했다고 한다. 그 후로 호주에 퍼스에서 워킹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영어와 일본어를 잘했고 일본어는 말을 안 하면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 할 정도로 잘했다.
나는 바로 출장 일정을 잡았다.
2월에 우린 함께 바로 일본으로 다시 떠났다.
처음 혼자 갈 때와 다르게 일본어를 잘하는 강대리와 함께 떠나니 맘이 편해졌다.
"근데 팀장님 제가 가서 뭘 해야 할까요? 강대리가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사실 나도 내가 가서 뭘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일단 일본에 가보자
가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
나는 이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못하면 그냥 돌아와야지...

강대리도 두 달 장도 다녀보고 더 다닐지 말지 결정해…
다시 돌아온 2월의 도쿄는 이미 봄이 오고 있었다. 한국과 다르게 따뜻한 봄 기운이 아사쿠사에 봄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선 우리는 아사쿠사 센소지가 한 눈에 보이는 아사쿠사 뷰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이부장이 예약한 호텔이었다.
1박에 6만엔이 넘는 퀸 침대 두 개가 있는 스위트 룸이었다.
창문을 열면 그 유명한 센소지의 중앙통로가 바로 보였다.

“이것 너무 비싼 호텔 아닙니까?

“여러 사람이 지내려면 이런 큰 호텔이 오히려 저렴합니다.”
이 부장은 그렇게 둘러대며 말했다. 내가 돈을 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예약한 호텔도 아니니 편하게 지내고 일만 잘하면 된다. 강대리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부장 말로는 6만엔이 넘지만 자기 지인을 통해 3만엔에 30일을 빌렸다고 한다.
사실 이부장은 사장과 친분이 있는 사이라 호텔 예약은 내가 결정한 부분이 아니었다.




비싸고 좋은 호텔로 옮겼다고 해서 일이 진해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미리 한국에서 만들어온 일본어판 고객관리 프로그램을 판매해 보기를 결정했다.
우선 접근이 쉬운 제일교포 매장을 중심으로 이과장이 영업을 하기로 했다.
간단한 설명서와 프로그램이 사용법을 알려줬다.
강대리와 나는 일본의 대기업과 사업설명회를 진행해보기로 했다.
우선 여기저기 알아본 대기업은 야후와 덴소였다.
일본에서는 지금이나 그 때나 야후가 인터넷 시작과 끝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은 지금도 야후를 주로 사용한다. 그 당시에도 야후가 가장 큰 인터넷 기업이다. 대부분 검색도 야후에서 한다.
이런 야후에서 우리 사업을 좋게 봐준다면 이 사업은 무조건 되는 것이다.

3월 벚꽃이 우에노 공원을 가득 피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매일 아사쿠사 근처나 우에노 공원을 달렸다. 벚꽃이 날리는 공원은 예뻤다.
봄 바람처럼 좋은 소식이 왔다.

일본의 모든 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되는 야후에서연 연락이 온 것이다.
사업설명회 자료를 만들고 일본어 PT 준비는 호텔에서 진행했다.

#4편 "도쿄의 밤거리"

“롯폰기 힐스에서의 사업 설명회"
롯폰기는 이제 막 완공된 일본의 마천루였다.
잦은 지진으로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일본에
200미터가 넘는 최고층 빌딩 롯폰기 힐스 모리타운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에겐 딱 맞는 건물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첫 사업 설명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호텔에서 나와 이부장의 차를 타고 롯본기로 이동했다.
금요일 2시 우리는 롯본기 힐스 8층에 엘리베이터를 막 올라탔다.
강대리는 첫 사업 설명회를 진행 때문인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나는 일본어를 못하니 할 일이 없었다.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 뿐이었다.

“강대리 너무 긴장 하지마" “되는 안 되는 여기까지 와서 야후에 사업 설명회까지 진행한 것도
강대리가 열심히 한 덕이고 안 되어도 강대리 탓은 아니야..”
이런 말을 건내기는 했지만 그것이 도움이 될 일이 없었다.
시간은 훌쩍 지났다.

빌딩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멀리 롯폰기의 거리가 한 눈에 들어왔다.
높은 빌딩이 별로 없는 곳이라 그런가..
멀리 빌딩 사이의 거리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정처 없이 흘러 가고있었다.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2시가 되었다.
야후에서 6명이 직원이 나와 있었다.
간단하게 회사 소개를 하고 우리는 사업 설명회를 진행했다.
“저희는 한국에서 온 모비디라는 회사입니다,”
“바코드를 이용한 회원증 쿠폰 마케팅 솔루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대리는 긴장하고 싶던 모습과는 달리 깔끔하게 설명회를 진행했다.
설명회에 참가한 야후의 진원들 휴대폰 번호를 받아 바코드를 전송했다.
그리고 스캐너를 이용해 간단하게 쿠폰을 인증하는 시연회를 진행했다.

스바라시.. 이이 데스네..

그들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1시간 정도의 설명회가 끝났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부장은 먼저 떠나고 나와 강대리는 함께 록폰기 힐스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빌딩 아래서 연주회를 하는 공간이 보였다,
젊은이 들이 모여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부럽다"
“뭐가요 팀장님"

“그냥 저렇게 우리도 자유롭게 살면 좋은데,,,”
강대리 우리 롯폰기의 거리나 한 번 걸어보자,,,

우리는 어느새 어두워 지기 시작한 롯폰기의 밤거리를 정처없이 걸었다.
밤 바람이 차가웠다.
그리고 관심이 있어 보였던 야후는 소식이 없었다.

보기좋게 탈락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야후가 왜 이 사업을 반대했는지 알 수가 없다.

충분히 매력있는 사업이었는데 말이다.
만약 야후에서 이 사업을 채택 했다면 우리는 대박을 쳤을 것이고 나는 여기에 내려와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몇 개의 대기업을 만나서 사업 설명회를 진행했지만 결국 좋은 결과를 받지 못했다.
그렇게 속절 없이 시간이 지났다.

나는 더 이상 비싼 호텔에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호텔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이사를 한 곳은 강대리가 일본에서 워킹으로 일할 때 사용한 아주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였다.

우리는 하루에 30만원짜리 고급 스위트룸에서 하루엔 만원짜리 게스트 하우스로 이사를 왔다.
우리가 이사를 온 곳은 히가시 코가네이 라는 곳이었다.

도쿄에서 서쪽으로 40분쯤 중앙선을 타고 오면 되는 곳이었는데 한국에서 따지면
김포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도쿄 시내를 벗어나 시골에 오니 우선 살 것 같았다.
고급 호텔의 침대에 비하면 불편했지만 맘은 편했다.

“이제부터 장기전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고 성과를 내보자"

#5편 “새로운 동네에서의 생활"
히가시코가네이는 몇 개의 대학과 도쿄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는 베드 타운이었다.
가까운 곳에 지브리스튜디오가 있다.
역을 나오면 라멘집이 하나 있고 백앤샵과 99엔샵 그리고 편의점과 식당 몇 개가 줄지어 있었다.
어디 서나 볼 만한 그저 그런 역이 있는 동네였다. 숙소로 가는 길에 공과 대학이 있었다.
가끔 운동장에서 야구나 축구를 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3월의 일본은 생각보다 추웠다. 난방이 잘되는 호텔에서 머물다가 왔더니 여긴 냉골이나 마찬가지였다.
벽에 있는 냉난방기가 돌고 돌았지만 난방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더구나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오래된 집을 보수해서 만든 게스트 하우스라 난방이 더 열악했다.
겨울이면 따뜻한 온돌에 익숙했던 나에게 춥게 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숙소 근처엔 꽤 큰 도쿄도립코가네이공원이 있다는 것이었다.
숙소에서 1키로 미터 저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매일 아침 공원으로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면 5키로 정도 되는 곳이고 경사와 평지가 적절하게 있어
운동하기엔 좋았다. 주말이면 많은 가족들이 산책을 하거나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개발이 많이 되지 않은 곳이라서 그런지 숙소 근처엔 키위농장과 가지
농장 감농장이 있었다. 공원을 가는 길에 무인 가판대가 있었다.

가지나 파 감자 토마토 양파 오이 같은 것을 백엔 단위로 판매하는 곳이었다.
작은 돈 통에 돈을 넣고 가져 가면 되었다. 주로 감이나 귤이나 오이를 사 먹고 했다.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기하기도 했고 한국의 농가들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숙소에는 일본인과 한국인 외국인이 많이 살았다.

매일매일 숙소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꽤 재미가 있었다.
대부분 학생들이거나 장기 여행자들이었고 가끔은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청년도 있었는데 이 숙소에 10년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떠나기 전에 그 도 떠났다.

아침은 주로 간단한 빵이나 삼각 김밥 점심은 외식 저녁은 라멘이나 가끔 집에서 요리를 하곤 했다.
강대리는 자취 생활을 오래 해서 요리를 꽤 잘했다. 맑은 매운탕이나 간단한 요리를 가능했다.
강대리가 요리를 하면 나는 설거지를 했다.
회사에서 준 법인카드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사 먹어도 되지만 성과도 없는데 돈을 많이 쓰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곳에 장기 숙박자 중엔 일본인 여성도 있었다.
이름이 하나코라고 했다.
“제가 할게요”
“왜요?”
“아.. 제 그릇도 있고 제가 잘하니까요”
몇 번 거절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하겠다고 하면 그냥 두었다.
그녀의 고향은 나고야라고 했다. 나이는 나랑 비슷했는데 나고야에서의 생활이 지겨워
도쿄에 2년째 살고 있다고 한다.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는데 가끔 우리 술자리에 앉아서 별 말없이 있다가 가곤 했다.
나는 당시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와 긴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

나의 형편없는 영어로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웠고 강대리가 중간에서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
숙소의 주인인 켄상은 50대였다. 그의 아내는 대형 트럭 운전수여서 며칠에 한 번씩 집에 오곤 했다.
숙소는 그와 그의 늙은 어머니가 운영했다.

아침에 달리기를 하러 가가면 하나코나 할머니가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곤 했다.
잇떼랏샤이 (잘 다녀오세요)
배웅을 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싶기는 했지만 싫지 않았다.
시골 동네의 3월의 공기는 상쾌했다.

한번은 하나코가 공원에 함께 놀러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는데 함께 공원까지 가는 것은 싫어 일이 있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말없이 걷는 것도 함께 있는 것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벚꽃이 지고 겹 벚꽃이 피고 있었다.
의미 없는 시간들이 꽃잎처럼 지고 있었다.
2000년 초반 당시에 일본에 진출한 한국 아이티 기업의 성과는 대부분 형편없었다.
대부분은 진짜 제품 보다는 일본에 지사가 있다는 식의 성과를 부풀려 한국에서 투자를 받으려는 기업이 대부분이었다.
때로는 한국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이 있던 제품도 반응이 좋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기술을 낮게 보는 시선도 한몫 했다. 물론 우리를 도와주려는 회사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첫 연락이 왔다.



#6편 첫 판매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기업을 방문하거나 인맥으로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나는 영업은 꾸준하게 했지만 결과가 없었다.
매일 숙소에서 긴시초에 있던 한국 비디오를 총판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당시까지 우리는 변변한 사무실도 없었다. 아니 필요가 없었다.

직원도 한국에서 온 두 명 그리고 일본에서 채용한 이부장 이 세 사람일 전부인 데다가
판매할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 신세를 졌던 긴시초에 사무실을 계속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긴시초는 도쿄의 서쪽에 있는 상업지구다. 역에서 내리면 스타벅스와 라쿠텐이 보인다.
우리는 출근해서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잔하는 것으로 그 날을 시작했다. 강물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디 론지 흘러가고 있었다.
그나마 출근할 곳이라도 있어 다행이었지만 남의 사무실 한 켠에 책상 하나만 놓고 사용하는 처지였다.
한국엔 서울 목동과 카이스트 안에 있는 커다란 사무실을 두고 남의 사무실 한 켠이나 사용하고 있는
처지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우린 할 일이 있어서 온 것이니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체인점에서 연락이 왔다. 도쿄 시내에 10개 정도의 체인점이 있는 야끼니꾸 체인점이었다.
지난번에 음식을 먹으려 방문했던 매장이었다. 술 자리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해하던 직원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직원이 사장에게 우리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 매장 사장이 당장 제품을 시연해 보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나와 강대리 그리고 김부장은 서둘러 매장을 방문했다. 매장은 신오오쿠보 역 근처에 있었다.
이 동네는 한국상점이 많고 한국 유학생도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제품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컴퓨터에 설치하는 제품이 아니라 서버에 접속만 해서 관리하는 제품이라 사용 설명만 하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사장 휴대폰에 바코드를 보내고 스캐너로 쿠폰이 인식되는 것을 확인한 사장은 아주 흡족해했다.
가장 맘에 든 부분은 업체에서 광고 메시지를 보낼 때 돈을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단골들의 연락처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단을 등록하고 쿠폰만 발송하면 되고 초기 설치비와 구입 비용
그리고 약간의 관리비만 내면 추가적인 마케팅 비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보내는 사람이 발송비용을 부담하지만 일본은 반대다.
보내는 사람은 돈을 내지 않고 수신하는 사람이 제목을 보고 수신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 다음 수신을 선택하면 수신자가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한국의 이메일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일본에서 이메일은 컴퓨터에서 확인하는
이메일이라는 개념 보다는 휴대폰으로 확인하는 개념이었다. 컴퓨터로 이메일을 확일 할 때 제목을 보고 확인하는 것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내가 일본이 좋은 시장이라고 생각 한 것도 이런 점이다.
이 매장 사장 다나카는 나름의 데이타베이스 마케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객 명단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인데 불구하고 벌써 체인점을 10개나 가지고 운영하고 있었다.
상품 시연을 본 다나카사장은 바로 계약하자고 했다. 물론 우리도 대만족,
어디든 제품을 팔아 실적을 쌓아야 한다. 실적 말고는 제품을 인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처음 일본에서 첫 판매 실적을 올렸다.
그날 우린 모두 신오쿠보 근처 술집에 가서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신오오쿠보엔 한국 상점들이 꽤 많았다. 여기 저기 한국 식당이 쉽게 보였다.
겨울연가로 한류가 막 시작하는 시절이었다. 일본의 아주머니들이 욘사마를 너무나 사랑했던 시기였다.
신오오쿠보에 한국 식당을 찾는 일본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도 한국 음식이 그리워지면 이 동네에서 주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영업도 일본인 가게 보다는 한국인 가게가 편하기도 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술 한잔했다.
주변에 한국은 가게가 많았는데 매장도 두 분류가 있었다.
하나는 오래된 술집이나 가라오케들이다. 여기 사장들은 대부분 제일 교포2-3세 들이 운영하는 곳이 많았다.
그리고 하나는 최근에 오픈한 곳들인데 이런 곳은 IMF 이후엔 한구에서 건너온 사람들이거나 일본에 부는 한류 바람을 타고 온 사람들이었다.
“여러분 이렇게 천천히 하나씩 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해봅시다.
나는 이렇게 팀원들에게 이야기했다. 모두 기분이 좋아 보였다.
“팀장님 이제 시작입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부장이 이렇게 말했다. 강대리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는 모처럼 편안하게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강대리와 나는 다시 JR주오선 마지막 열차를 타고 숙소로 행했다.
늦은 히가시코가네이 역 앞에서 강대리와 다시 편의점에서 구입한 맥주 두 캔으로 오늘의 첫 수확을 다시 한번 축하했다.
일본의 3월의 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오늘 밤의 바람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팀장님 일본에 온지 4개월 만에 첫 판매군요. 저는 우리가 하나도 팔지 못하고 철수하는 것 아니지 매번 고민했습니다.
” 본사에서나 나나 아무 말도 없었지만 강대리는 마음 고생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 나 역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천천히 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났다. 이부장이 어디서 상담이 왔다며 연락이 왔다.
“팀장님 우리 오사카나 한 번 갈까요?”
그렇게 우린 오사카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댓글10개이상올라오면 7편도 연재.. 반응 없으면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일본에서의 경험에 픽션을 더한 팩션 소설임을 알려 드립니다.



#7편 오사카 출장


도쿄에서 오사카로 출장을 계획되었다. 도쿄에서 오사카는 560키로 정도다.

보통은 신칸센을 주로 이용하지만 우리는 3명이나 되고 나고야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해서 이부장의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사실 그동안 일만 하느라 도쿄를 벗어나 본적이 없다. 오랜만에 여행을 겸해서 오사카로 출장을 가기로 결정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도쿄를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얼마 가지 않아 멀리 후지산이 보였다. 아직 눈이 쌓여 있었다. 녹차로 유명한 시즈오카에 휴게소에 들렸다.

녹차가 유명해서 그런지 통을 가져오면 적은 돈을 지불하고 녹차를 마음껏 통애 담아 갈 수있다는 써있었다.

하지만 일본식 녹차를 좋아하지 않아 담지는 않았다.

나고야에 도착하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우리의 약속 장소나는 나고야 역 근처였다.

나고야는 일본의 4대 도시중에 하나라고 하지만 달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나고야 마라톤이 먼저 기억이 남는 곳이었다.

역 근처 숙소에 주차를 하고 나고야역 앞에 있는 야끼니꾸 가게로 향했다.

거기에 도착해보니 이부장의 선후배들이 모여 있었다.
“이부장님 우리는 따로 갈테니 지인 분들이랑 함께 하는 것이 어떤가요?
아는 사람도 없는데.. “

하지만 이부장은 일본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좋다면서 그 자리에 앉게 했다.

일본에서 사는 20-30대 한국인들의 사연을 들을 수가 있었다. 모두들 일본에 사는 문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외국에 사는 이주민들이 겪는 어려움이 오래된 노래처럼 흘러 나왔다.

거기엔 조선학교를 나온 청년도 있었다.
나는 조선학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우연히 내 옆자리에 그 청년이 앉아 있어 꽤 긴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나 보다 5살이 어린 청년이었다.
자신은 초등학교부터 대학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조선학교는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일본 전역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해방이 된 이후에 일본에서의

생활터전 결혼 아이들 교육등 여러가지 사정 때문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 전쟁이 터지고 남 북으로 분단 되었다.

“우린 조선인인데 조선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래서 갈 곳이 없어진 거죠”
“우린 한국인도 북한 사람도 일본인도 아닌 조선 사람이거든요”
“조선이 사라졌으니 갈 곳이 없어진 것이죠 그래서 조선학교를 만든 겁니다”

잠시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일하는 몇 개월 동안에도 고향이 그립고 한국이 그리울 때가 있는데

분단이라는 조국의 현실 때문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다니 슬픈 일이었다.
술자리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다시 오사카로 향했다.
고속도로 옆으로 태평양의 보였다.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이부장의 차에서는 오래된 일본 노래가 흘러 나왔다.

팀장님 이 여자 노래 아세요?
제가요. 당연히 모르죠?
누군데요?
아니 이 유명한 여자인데 모르세요?

들어보니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 봤던 것 같기도 하다.

あー 私の恋は 아- 와타시노 코이와 아- 내 사랑은
南の風に乗って走る 미나미노 카제니놋떼 하시루와 남쪽 바람을 타고 달릴거에요
あ- 靑い風切って走れあの島へ…아- 아오이카제 키잇떼 하시레 아노 시마에…
아- 푸른 바람을 가르고 들려줘요 그 섬으로…

창문 밖으로 넓은 태평양 바다에서 불어오는 푸른 바람이 불어왔다.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따뜻한 햇살 때문인지 눈이 감겼다.

팀장님 일어 나시죠? 이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차는 막 오사카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되어서야 우린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오사카성 근처였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오사카 공단으로 향했다.
오사카 공단의 아오키 토요히코씨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단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엉뚱하게 인공위성을 만들겠다는 발상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2002년 7월 '히가시 오사카 우주관련개발연구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2005년까지 인공위성을 만들어 발사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벽 면에는 인공위성 사진과 계획표 그리고 함께 협동조합을 만든 공장들의 명단이 보였다.

아오끼 회장의 이야기는 대충 이랬다. 오사카의 오래된 공장들이 많다. 그래서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인공위성 프로젝트 역시 그런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오사카의 작은 부품 공장이 많은데 그런 부품을 모으면 인공위성 같은 첨단 제품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들었을 때는 이 사람들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낙후된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창의적인 발상을 하고 도전하는 아오끼 회장의 모습은 새로워 보였다.

더구나 자기 회사가 아니라 오사카 전역의 작은 부품회사들의 성공을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고

멀리 도쿄에 있는 우리 회사까지 연락을 해왔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성공은 결국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의 열정의 결정체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회사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아오키 회장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이 겹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어떻게딘 우리와 접점을 찾아 보려고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다시 한 번 미팅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오사카 시내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강대리의 지인이었다.

글리코 회사의 유명한 광고판 사나이가 반겨 주고 있었다.
저녁은 글리코 보다는 유명하지 않지만 커다란 6미터 크기의 로봇 게 간판으로 위명한 카니토라쿠라는 게요리점이었다.

우리를 초대해준 분은 강대리의 지인인 한국인 여자분이었다.

강대리가 오래전에 6개월 정도 일본회사에서 일 할 때 함께 일한 분이라고 한다 .그 분 덕에 오랜만에 게 요리를 가득 먹었다,

다음 날 새벽 오사카성 주변을 달렸다. 달리는 사람들들이 꽤 많았다.

오사카성은 임진년에 조선을 침범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성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작은 비석 하나가 있는데 일본육군형무소터가 있다. 여긴 윤봉길의사가 일본으로 끌려와 처음 처음 수감된 곳이라고 한다.

주변에 이른 시간에도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오후에 다시 아오끼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저는 당신들과 일 하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든 제가 도와줄 부분이 있다면 연락 주세요. 모바일 사업이라는 것도

신사업이니 앞으로 미래 시장의 큰 영향을 줄 것 같습니다. 우리도 미래로 나가고 싶어요.”

아오키 회장을 만나 그의 친분 관계를 맺은 것이 이번 오사카 출장의 유일한 성과였다.

그렇게 우리의 오사카 출장은 별 성과없이 허무하게 끝났다.이부장님 도쿄로 돌아 갑시다.

잠시 교토에 들려 갈까 했지만 성과가 없어서 그런지 우린 그 밤에 도쿄로 향했다. 마지막 기차를 타고 하사시 코가네이로 향했다,

강대리 아오키 회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기차에서 강대리에게 물었다.

“전 그 분처럼 살고 싶은데요. 현실의 굴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도전하고 싶어요.

그래 우리도 그렇게 한 번 해보자.

조금 더 나아가면 무엇인가 더 좋은 성과가 있을 거야"

그리고 며칠 후 우린 잠시 정든 히가시 코가네이를 떠나게 되었다.



“히가시 코카네이를 떠나며 그리고 고백”
어느덧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있다. 코가네이의 작은 방 2층 침대, 30년은 된듯한 철재 침대에서 노인의 무릎처럼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켄상의 어머니가 방을 청소하는 소리 저녁이면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말로 거실을 메우던 소리들…

그렇게 덥고 습한 일본의 여름이 찾아왔다.
“팀장님 언제까지 그런 숙소에서 있을 겁니까?”
“제가 여기저기 부동산에 연락을 해 뒀는데 오늘 부동산에서 꽤 좋은 조건의 맨션이 나왔다고 연락이 왔어요. 한 번 가 보시죠.” 이 부장의 전화였다.
사실 여기로 오면서 부터 다른 숙소를 구하고 있었다. 일본은 숙소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작은 원룸이라면 쉽게 구하겠지만 우린 맨션을 구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찡이니 샤샤킹이니 이해도 어려운 용어들이 방을 구하기부터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런 일은 이부장이 알아서 처리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알아보다 구한 방이 서쪽 니시아라이에 있는 솔라리스 맨션이었다.
맨션은 5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우리 방은 2층이었다. 남향이었다. 맨션 앞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뒤로는 기차 선로가 보였다.
기차 선 뒤로는 2층 집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동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히가시코가네이보다는 더 도시 다운 곳이었다. 치바현과 멀지 않았다. 방 두개의 거실 부엌 화장실이 하나였다. 월세 10만엔 정도의 최근 지어진 깨끗한 맨션이었다.
지금 사는 곳에 비하면 환경이 너무 좋았다. 별 고민 없이 계약을 했다.그렇게 우리는 니시 하라이의 솔라리스맨션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동안 정들었던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과 간단한 송별회를 했다. 맥주와 소주 그리고 안주는 우리가 준비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밤새도록 즐겁고 아쉬운 대화가 이어졌다. 적당히 취했다. 그렇게 이 곳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이 되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슈트 케이스 하나가 전부라 전철을 타고 가기로 했다.
“조상”
“네. 무슨 일인가요?
떠나는 나에게 하나코가 편지 하나를 건넸다. 일본어를 써져 있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이 아쉬워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편지를 받고 떠나는 나에게 그녀는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했다.
우리는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히가시코가네이의 기차역으로 행했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의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다시 이별을 했다.
저녁이면 가끔 찾던 간다상의 라멘집 단골 100엔샵 편의점 그리고 자주 가던 공원 모든 것이 기차와 함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팀장님 하나코가 뭐라하지 않던 가요?”
“편지 하나 주던데 읽어 봐라?”
사실 어젯밤에 하나코가 저에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뭐라고 했는데.
어제 밤에 술자리에서 강대리에게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쪽지엔 자기도 곧 여기를 떠나니 나고야 자기 집 주소와 연락처 그리고 언제든 나고야에 오면 자기에게 꼭 연락해 달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가끔 나고야에 출장을 가면 그녀가 생각나곤 했다. 나에게 친절했고 설거지도 자주 해주고 생각해 보니 가끔 아침도 챙겨 주기도 했던 것 같다. 친절에 대한 보답을 해줬 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건내 준 편지가 사라져서 연락을 할 길이 없었다.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마워요. 하나코.. 나는 이렇게 나고야에 가면 속으로 인사를 하곤 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완벽한 집을 얻게 되었다. 이젠 제대로 살림을 해야 해서 이런저런 짐들을 구했다. 다행히 맨션에 세탁기나 냉장고가 다 있었기 때문에 우린 간단한 살림 도구만 구하면 되었다.
무인양품점과 100엔샵에서 간단한 살림 도구를 챙겼다.
무인양품점은 1989년에 생긴 업체다. 상표가 없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이것 자체가 브랜드가 된 것이다. 모두가 상품엔 확실한 브랜드나 상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할 때 그들은 상표가 없는 것을 브랜드로 내세운 것이었다. 마케팅의 핵심은 차별화라는 말이 딱 맞는 회사였다.



9편 “일본_야쿠자와_사업_상담”
이부장은 언제부터 인가 만나보면 좋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팀장님 오늘 오후에 시간이 되나요? 왜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요. 일단 아사쿠사 뷰 호텔 커피숍으로 오세요. 오시면 전화 주세요. 이부장은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나와 강대리는 아사쿠사로 향했다. 니시 하라이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야마노테선으로 갈아타고 아사쿠로로 향한다. 아사쿠사 뷰 호텔은 일본에 처음 왔을 때 한 달 정도 살았던 호텔이었다. 아사쿠사는 일본의 유명한 센소지를 절이 있는 곳 바로 뒤편에 있는 호텔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꽤 유명한 호텔이었다. 센소지까지는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코앞이었다. 근처엔 스미다강이 흘렀다. 하지만 절 뒤편으로는 오래된 골목들이 많았고 3편에 천엔짜리 오래된 극장들도 보이는 곳이었다. 뷰호텔의 호텔 커피숍은 갈색 소파와 백열등 호텔 로비가 다 보이는 곳이었다. 남쪽으로는 센소지가 보였다. 호텔 출입문의 화려한 전등과 비교되는 차분한 곳이었다. 우리는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했다. 오랜만입니다. 지난 번에 저희 호텔에 오래 머무르셨죠? 직원은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커피 두 잔 주세요. 일본 특유의 무더운 날씨에도 많은 인파들이 센소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호텔 입구에 이부장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우리 테이블 뒤쪽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인사하세요. 이 분은 이 동네에서 잘 나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일본어를 못하니 그냥 간단하게 인사말만 건넸다. 강대리가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했다. 팀장님 이 분이 야쿠자라고 하는데요. 일본의 야쿠자는 프라다 검은 가방과 크라운 검색세단을 타고 다닌다고 했는데... 그도 검은 가방과 검은 양복에 흰색 목 티를 입었는데 깡말랐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5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근데 왜 우리를 … 사업을 하는데 우리 아이템에 관심이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성과가 필요했던 나는 일단 이야기나 들어 보라고 강대리에게 전했다. 내용은 그 야쿠자가 하는 사업 아이템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하고 있는 바코드 관련해서 뭔가 해보고 싶기도 하고 내용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야쿠자들도 모바일 사업에 관심이 많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술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한국의 흔한 술집은 아니었다. 꽤 비싼 술집이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나는 몇 잔 마시고 있었다. 김부장과 야쿠자는 술을 잔뜩 마시는 것 같았다. 그는 게이오 대학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뷰 호텔을 예약할 때 반값에 우리에게 호텔 요금을 해줬다고 했다. 자신의 관리하는 층이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식으로 돈을 버는 것 같다. 이부장과 그는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한다. 그의 부인이 한국인이고 이 부장이랑 나이가 비슷하다고 했다. 후에 그의 부인도 만나 봤는데 부동산 사업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첫날 우리는 별 이야기 없이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이부장은 나에게 200만원을 건넸다. 어제 그 야쿠자가 용돈을 줬다는 것이다. 야쿠자에게 용돈을 받아야 하는 형편도 아니고 돈에는 항상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 나는 받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돈을 돌려보내라고 했다. 이부장은 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돌려주었는지 아니면 그 돈을 이부장은 혼자 꿀꺽 했는지는 관심이 없다. 내가 받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후에도 나는 야쿠자와 몇 번 더 만났다. 부동산이 몇 개 있는데 그걸 한국인 유학생에게 임대해서 먹고 산다고 한다. 야쿠자는 그후로 몇 번 연락이 왔지만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그 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가끔 그 돈을 받았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돈에는 항상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야쿠자들은 불법으로 일을 하고 이 일을 안 하는 대가로 정부나 기업에게 돈을 받아 낸다고 한다. 이를 테면 불법 교통카드를 만들어 유통하고 이것을 하지 않는 대가로 정부에게 사업이나 돈을 받아 낸다고 한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여름이 가고 있었다. 니시 하라이의 서의 아무렇지도 않은 생활이 이어졌다. 공원에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벌써 가을이 오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근처 라멘 집에서 라멘을 먹었다. 매일 가는 라멘집 니시하라이 역 앞에 있는 슈퍼 그리고 공원 일상이 되어버린 하루하루가 별 의미 없이 착착 지나가고 있었다. 가을 국화꽃이 필 무렵 우리는 도야마에 가기로 했다.




10편 “도야마에서제품설명회”

팀장님 다음주에 도야마에 한 번 가보죠. 도야마가 어디 있는데. 한국의 동해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도야마 시에서 설명회를 해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교통비와 호텔비 식사까지 모두 제공 한다고 합니다 1편에서9편까지는여기에서 https://www.farmmate.com/board/view?id=custom_bbs2&seq=9725 "그래 그러면 다음주에 급한 일도 없으니 가보자…" 우리의 도야마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도로 도야마를 살펴보니 주변에 높은 산이 많아 보였다. 우린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가다가 열차를 한 번 갈아타고 서야 도야마에 도착했다. 우리를 마중 나온 분은 한국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미라라고 합니다" 전 도야마에서 20년을 살았어요. 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일단 호텔로 모실께요. 호텔은 JAL항공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이었는데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제법 크고 좋은 호텔이었다. 저녁은 따로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일본은 어디나 생선이 흔한 곳이지만 바로 바다 옆이어서 그런지 싱싱한 생선 요리가 많았다. 2시간 정도의 형식적인 환영만찬이 이어졌다. 환영행사가 끝나고 강대리와 나는 도야마의 밤 거리를 걸었다. 시내 중심으로 마츠강이 흐르는 도야마는 아주 예쁜 도시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10월이었는데 이미 산에 눈이 쌓여 있었다. 하천 주변엔 동상들이 많았다. 강 옆으로 길게 벚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강폭이 좁아 나무와 나무가 연결되어 터널처럼 보였다. 봄에 벚꽃이 피면 아주 예쁠 것 같았다. 다음날 새벽 도야마의 거리를 달렸다. 달리기를 좋아하다 보니 어디를 가도 운동화와 운동복을 항상 챙겨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어제 본 하천을 따라 달려가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가 보였다. 너무 멀리 온 것 같았다. 서둘러 호텔로 달렸다. 오전 일정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도야마 인구 40만 정도로 우리가 많이 아는YKK라는 회사가 있는 곳이다. YKK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의류 부자재를 만드는 회사로 유명하다. 그것을 빼고 나면 산업이 발달한 도시는 아닌 것 같았다. 조금만 벗어나도 시골 풍경이 이어졌다. 논밭이 이어진 시골마을 풍경과 서쪽으로는 일본 알프스라고 불리는 3천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 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있는 곳이어서 조용하게 살기 좋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사는 도야마에 있는 회사들과 한국 회사들 제품을 서로 소개하는 것이었다.한일 기업 친선회였다. 침체된 도야마의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이런 친선회를 개최한 것 같다. 우리는 노트북에 우리 제품을 바로 시연해 볼 수 있도록 설치를 했다. 가끔 오는 일본 바이어들에거 제품을 설명했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바코드를 휴대폰으로 보내 주고 인증하는 시스템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우리도 도야마의 제품을 살펴봤지만 우리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별일 없는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겉으로 좋다고 해도 진짜 좋은 것도 아니고 안 좋다고 해도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들도 많아요” 라고 이미라씨가 말했다. 네. 저희도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휴가 겸 온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미라씨는 시간이 된다면 자기 집에 와서 식사를 해도 된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오래전에 한국 여자들이 일본 사람들과 결혼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녀도 우연하게 일본 사람과 만나 결혼해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한국에 있는 동생 같다면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의 집은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시골에 있는 2층집 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그녀의 큰딸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이제 막 20살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동방신기의 펜이라면서 우리에게 동방신기에 대해 물었지만 둘 다 아는 것이 없었다. “아니 한국 사람들은 동방신기를 모르나요?” “우리가 관심이 없어 서요” 그녀의 남편은 다른 지방으로 출장을 같다고 하다. 미라씨는 나베요리를 해줬다. 따뜻한 국물을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직접 만든 김치도 주었는데 맛이 좋았다. 일본에서 사는 것은 어떤 가요? “큰 차이 있나요? 다 비슷하죠” “남편은 착한 사람이라 큰 무리 없이 살고 있어요” “한국과도 가깝고 자주 한국에 가고 있어요? 따님이 한국어를 할 줄 아네요. 제가 꾸준하게 가리켜서 기본적인 말을 할 줄 알아요. 최근엔 동방신기 펜이라 그런지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합니다. 우린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미라씨가 호텔까지 우리를 태워다 주었다. 혹시 나중에 딸이 도쿄에 가게 되면 좀 살펴 주세요. 도쿄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니까요? “저희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어 언제 떠날지 모르겠지만 오면 연락 주세요” 그녀는 우리의 명함을 흔들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돌아가고 우리는 근처 이자카야에서 술을 한 잔 마셨다. “팀장님 이 동네가 딱 팀장님이 좋아하는 동네 같아요? “높은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논도 있고 팀장님은 이런 곳 좋아하잖아요? “맞아 나 이런 시골이 좋아” 너는 도야마가 어떠냐? 저는 호주 퍼스가 좋은데요. 퍼스.. 네 거기서 워킹으로 1년 보냈거든요. 거기도 사실 호주의 서쪽 끝입니다. 편하게 살기 좋은 동네예요. 팀장님 나중에 저랑 퍼스에 안 가볼까요? 우리 거기 가서 함께 사업을 해보면 어떨까요? 둘이 함께 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러면 재밌을 것 같다. 그런데 난 영어도 못하는데... 그건 공부하면 되죠. 우린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면 도야마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돌아가는 길에 온천이 많은 작은 도시엔 잠시 내렸다. 신카센으로 갈아타기 위해서다. 몇 시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온천욕을 했다. 그리고 동네에 작은 식당에서 밤을 먹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동네 선술집 같은 곳이었다. 맥주 한 잔을 마셨다, 이번에 보니 바코드 시스템 가지고는 안 될 것 같다. 이 대리 내가 생각한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신제품을 하나 만들어 보자. 우린 그렇게 신제품을 개발하기로 했다.


11편신제품개발
팀장님 신제품이면 이번에도 바코트 프로그램일까요? 강대리가 물었다.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고객관리 프로그램 설계는 내가 만든 것이다. 바코드를 이용한 기본적인 고객관리 프로그램이었다. 매장에서 우리 제품을 구매하면 해당 업체의 모바일 홈페이지가 자동으로 만들어지고 매장 정보와 소개 페이지 그리고 할인정보나 내 포인트 확인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제품을 설치하면서 느낀 문제가 있었다. 일본의 많은 매장들이 휴대폰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통신사는 NTT도코모, KDDI, 그리고 보다폰이었다. 한국의 SK, KT, LG가 있는 것처럼 일본도 3개의 메인 통신사가 있었다. 우리 제품이 잘 판매 되려면 모든 매장에서 휴대폰 통신이 잘 되어야 하는데 내가 방문한 매장이나 이용했던 가게에서도 가끔 통화가 되지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바코드로 인식이 되지 않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한국의 경우 통화가 되지 않으면 업체에서 무상으로 중계기를 설치해준다. 일본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업체가 설치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장에서 설치를 요청하면 통신사에서 돈을 받고 설치를 해주고 있었다. 더구나 그 비용은 30만엔 우리 돈 300만원 정도 했다. 그러니 매장에서는 손님들을 위해 중계기를 설치해 주고 싶어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고객의 편의를 위해 30만엔을 투자한다고 해도 이것이 단 하나의 통신사에 지불하는 비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3개의 회사에 중계기를 설치하려면 900만원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은 1990년 버블경제 이후 지속적인 불황 이어지고 있었고 성장이 없는 시기였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행했던 말이 "이대로도 괜찮다"라는 말이었다. 성장이 멈춘 시대로 10여년을 살다 보니 그 불황에 적응해버린 것이다. 성장이 없다는 것은 투자를 하지 않는 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900만원을 투자해서 통신문제를 해결하는 매장은 당연히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3개 회사를 모두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중계기를 만들어 저렴하게 공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강대리 어떠냐? 우리 중계기 한 번 만들어 보자! 시장 조사를 해보니 일본에도 그런 중계기를 판매하는 회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격이 터무니 없이 높았다.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었다. 하지만 가격 경쟁력과 품질만 좋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강대리 한국에 좀 다녀와야겠다. 그렇게 급하게 비행기를 예약해서 나리타 공항으로 행했다. 몇 개월만에 한국 행이었다. 회사로 돌아와 대표와 이런 제품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를 했고 당연히 대표도 좋아했다. 먼저 중계기를 만들어줄 회사가 필요했다. 조사를 해보니 중계기 하나에 3개 회사를 모두 대응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은 큰 기술은 아니었다. 강대리를 통해 일본 통신사의 주파수 대역을 조사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은 각 회사마다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대가 있다. 외부에 이 주파수를 수신하는 안테나를 하나 설치하고 실내에 이 주파수를 송수신 하는 장비를 설치하면 중계기 설치는 끝나는 것이다. 한국에서 중계기를 만드는 회사를 검색해보니 시흥공단에 K업체가 실력이 좋아 보였다. K업체의 담당자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해줬더니 담당자는 이 제품을 만드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제품 단가도 40만원대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은 중계기만 25만엔이었다. 거기 다가 설치비가 25만엔이었다. 우리돈으로 500만원이었다. 업체는 한 달 정도면 샘플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한 달 동안 이제 설치팀을 만들고 제품 홍보를 해서 판매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제품만 있으면 일본에서 정착하는 것도 문제가 안 될 것 같다. 상품이 다양해야 영업도 잘되는 법이다. 한 가지 상품만 가지고 승부를 보기 힘들다. 더구나 같은 휴대폰에 관한 상품이니 영업하기도 쉬울 것 같았다. 한국에서의 짧은 일주일동안 제품개발과 업체 미팅으로 순식간에 흘러갔다. 내가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 본사는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새로운 직원들이 충원되었고 퇴사한 직원들도 있었다. 회사는 목동으로 이사를 준비중이었다. 카이스트 안에 커다란 사무실을 두고 목동으로 이사를 가다니.. 한국 본사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내가 맞은 것은 일본이었다. 다시 인천공항을 행했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 밖으로 서해 바다가 보였다. 넓게 펼쳐진 개펄 위로 기러기들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고향에는 기러기가 많았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에는 수확하고 남은 벼이삭이 많았다. 기러기에게 이삭은 겨울을 날 수 있는 좋은 식량이 되어주었다. 가끔은 수십만 마리의 기러기가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러면 순식간에 태양이 사라지고 마을이 한 밤중이라도 된 것처럼 어둠에 잠겼다가 기러기가 논에 앉으면 다시 해가 보였다. 그럴 때면 농로의 수로 통로에 몰래 숨어 기러기를 훔쳐 보곤 했다. 가까이서 본 기러기는 생각보다 너무 컷다. 브이자형 편대로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고향 마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있었다. 다시 일본에 돌아왔다. 이제 새로운 제품을 런칭할 계획을 세워야 했다. 제품을 판매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우선 제품이 좋아야 한다. 내가 생산을 맞긴 업체는 한국의 통신사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업체였다. 기술력이 이미 입증된 회사라 품질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제 가격을 정해야 한다. 매장에서 접근할 수 있는 가격이어야 하고 회사도 수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설치비도 고려해야 한다. “제품의 품질이 우수하다면 결국 구매를 결정하는 것은 가격이다" 설치를 담당해줄 일본팀을 알아봐야 했다. 시장 조사를 해보니 일본엔 중계기 설치만 하는 전문업체가 있었다. 몇몇 회사에 전화를 해서 그 중에서 한 회사와 약속을 했다. 방문해 보니 회사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다. 직은 3명이었다. 대표는 아라이라고 하는 젊은 사장이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구보다 그리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직원 한 명이 있었다. 중계기 설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니 이것 또한 쉽지 않았다. 일본 매장들은 대부분 임대 매장이고 보통은 수십년 장기 계약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건물에 손상을 입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계기를 설치하려면 외부 중계기와 내부 송수신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연결하는 전선이 필요하다. 전선을 외부에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건물에 구멍에 내거나 창문 틈을 이용하는 방식만 가능했다. 아라이 대표에 말에 따르면 건물에 구멍을 내는 것은 건물주가 너무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옥상에 설치를 해서 선을 내려서 다른 선들이 들어가는 곳을 찾아야 하고 .. 대표의 말에 따르면 힘들고 그래서 비용이 많이 발생한다. 설치비로 150만원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돈을 주고 나면 경쟁력이 없었다. “이 정도 가격으로는 경쟁력이 없습니다.” “가격을 좀 낮춰 주시죠” “매장 한 곳당 100만원 정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경우엔 30만원 정도면 가능했다. 아라이 대표는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미팅은 이렇게 끝났다. 우린 아직 제품도 없는 상태라 급하지는 않았다.

11편

팀장님 신제품이면 이번에도 바코트 프로그램일까요? 강대리가 물었다.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고객관리 프로그램 설계는 내가 만든 것이다. 바코드를 이용한 기본적인 고객관리 프로그램이었다. 매장에서 우리 제품을 구매하면 해당 업체의 모바일 홈페이지가 자동으로 만들어지고 매장 정보와 소개 페이지 그리고 할인정보나 내 포인트 확인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1편에서10편까지는여기에서 https://www.farmmate.com/board/view?id=custom_bbs2&seq=9725 제품을 설치하면서 느낀 문제가 있었다. 일본의 많은 매장들이 휴대폰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통신사는 NTT도코모, KDDI, 그리고 보다폰이었다. 한국의 SK, KT, LG가 있는 것처럼 일본도 3개의 메인 통신사가 있었다. 우리 제품이 잘 판매 되려면 모든 매장에서 휴대폰 통신이 잘 되어야 하는데 내가 방문한 매장이나 이용했던 가게에서도 가끔 통화가 되지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바코드로 인식이 되지 않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한국의 경우 통화가 되지 않으면 업체에서 무상으로 중계기를 설치해준다. 일본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업체가 설치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장에서 설치를 요청하면 통신사에서 돈을 받고 설치를 해주고 있었다. 더구나 그 비용은 30만엔 우리 돈 300만원 정도 했다. 그러니 매장에서는 손님들을 위해 중계기를 설치해 주고 싶어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고객의 편의를 위해 30만엔을 투자한다고 해도 이것이 단 하나의 통신사에 지불하는 비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3개의 회사에 중계기를 설치하려면 900만원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은 1990년 버블경제 이후 지속적인 불황 이어지고 있었고 성장이 없는 시기였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행했던 말이 "이대로도 괜찮다"라는 말이었다. 성장이 멈춘 시대로 10여년을 살다 보니 그 불황에 적응해버린 것이다. 성장이 없다는 것은 투자를 하지 않는 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900만원을 투자해서 통신문제를 해결하는 매장은 당연히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3개 회사를 모두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중계기를 만들어 저렴하게 공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강대리 어떠냐? 우리 중계기 한 번 만들어 보자! 시장 조사를 해보니 일본에도 그런 중계기를 판매하는 회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격이 터무니 없이 높았다.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었다. 하지만 가격 경쟁력과 품질만 좋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강대리 한국에 좀 다녀와야겠다. 그렇게 급하게 비행기를 예약해서 나리타 공항으로 행했다. 몇 개월만에 한국 행이었다. 회사로 돌아와 대표와 이런 제품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를 했고 당연히 대표도 좋아했다. 먼저 중계기를 만들어줄 회사가 필요했다. 조사를 해보니 중계기 하나에 3개 회사를 모두 대응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은 큰 기술은 아니었다. 강대리를 통해 일본 통신사의 주파수 대역을 조사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은 각 회사마다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대가 있다. 외부에 이 주파수를 수신하는 안테나를 하나 설치하고 실내에 이 주파수를 송수신 하는 장비를 설치하면 중계기 설치는 끝나는 것이다. 한국에서 중계기를 만드는 회사를 검색해보니 시흥공단에 K업체가 실력이 좋아 보였다. K업체의 담당자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해줬더니 담당자는 이 제품을 만드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제품 단가도 40만원대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은 중계기만 25만엔이었다. 거기 다가 설치비가 25만엔이었다. 우리돈으로 500만원이었다. 업체는 한 달 정도면 샘플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한 달 동안 이제 설치팀을 만들고 제품 홍보를 해서 판매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제품만 있으면 일본에서 정착하는 것도 문제가 안 될 것 같다. 상품이 다양해야 영업도 잘되는 법이다. 한 가지 상품만 가지고 승부를 보기 힘들다. 더구나 같은 휴대폰에 관한 상품이니 영업하기도 쉬울 것 같았다. 한국에서의 짧은 일주일동안 제품개발과 업체 미팅으로 순식간에 흘러갔다. 내가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 본사는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새로운 직원들이 충원되었고 퇴사한 직원들도 있었다. 회사는 목동으로 이사를 준비중이었다. 카이스트 안에 커다란 사무실을 두고 목동으로 이사를 가다니.. 한국 본사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내가 맞은 것은 일본이었다. 다시 인천공항을 행했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 밖으로 서해 바다가 보였다. 넓게 펼쳐진 개펄 위로 기러기들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고향에는 기러기가 많았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에는 수확하고 남은 벼이삭이 많았다. 기러기에게 이삭은 겨울을 날 수 있는 좋은 식량이 되어주었다. 가끔은 수십만 마리의 기러기가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러면 순식간에 태양이 사라지고 마을이 한 밤중이라도 된 것처럼 어둠에 잠겼다가 기러기가 논에 앉으면 다시 해가 보였다. 그럴 때면 농로의 수로 통로에 몰래 숨어 기러기를 훔쳐 보곤 했다. 가까이서 본 기러기는 생각보다 너무 컷다. 브이자형 편대로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고향 마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있었다. 다시 일본에 돌아왔다. 이제 새로운 제품을 런칭할 계획을 세워야 했다. 제품을 판매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우선 제품이 좋아야 한다. 내가 생산을 맞긴 업체는 한국의 통신사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업체였다. 기술력이 이미 입증된 회사라 품질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제 가격을 정해야 한다. 매장에서 접근할 수 있는 가격이어야 하고 회사도 수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설치비도 고려해야 한다. “제품의 품질이 우수하다면 결국 구매를 결정하는 것은 가격이다" 설치를 담당해줄 일본팀을 알아봐야 했다. 시장 조사를 해보니 일본엔 중계기 설치만 하는 전문업체가 있었다. 몇몇 회사에 전화를 해서 그 중에서 한 회사와 약속을 했다. 방문해 보니 회사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다. 직은 3명이었다. 대표는 아라이라고 하는 젊은 사장이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구보다 그리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직원 한 명이 있었다. 중계기 설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니 이것 또한 쉽지 않았다. 일본 매장들은 대부분 임대 매장이고 보통은 수십년 장기 계약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건물에 손상을 입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계기를 설치하려면 외부 중계기와 내부 송수신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연결하는 전선이 필요하다. 전선을 외부에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건물에 구멍에 내거나 창문 틈을 이용하는 방식만 가능했다. 아라이 대표에 말에 따르면 건물에 구멍을 내는 것은 건물주가 너무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옥상에 설치를 해서 선을 내려서 다른 선들이 들어가는 곳을 찾아야 하고 .. 대표의 말에 따르면 힘들고 그래서 비용이 많이 발생한다. 설치비로 150만원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돈을 주고 나면 경쟁력이 없었다. “이 정도 가격으로는 경쟁력이 없습니다.” “가격을 좀 낮춰 주시죠” “매장 한 곳당 100만원 정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경우엔 30만원 정도면 가능했다. 아라이 대표는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미팅은 이렇게 끝났다. 우린 아직 제품도 없는 상태라 급하지는 않았다.


12편모르는전화 전화벨이 울린 것은 오후 4시쯤이었다. 모르는 전화였다. 받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시간쯤 지나 전화를 걸어봤다. "모시모시" 받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일까요? 전화가 와서.. 저는 유나라고 합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누구일까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전에 공항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요? 아... 네... 그때 공항에서 만났던... 일본 여자분 기억합니다. 그 분 맞죠? 네. 맞아요. 당시 중계기로 바빴기 때문에 한달에 한 번 아니면 한 달에 한 두 번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과 일본을 오갔다. 비행기를 타는 것이 버스를 타는 것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나리타에 1공황과 2공항으로 나눠져 있다. 항상 1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렸다. 처음엔 공항에 2시간전에 도착했지만 점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을 남겨두고 공항에 가게 되었다. 그날도 어느 날처럼 당연하게 공항 기차를 타고 1공항에서 내렸다. 별 생각없이 앉아 있다가 발권을 하려고 보니 불가능했다. 일본어를 잘못했기에 직원이 하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비행기를 타야 하는 시간이 20분도 남지 않았다. 잘 들어보니 2공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2공항으로 갔다. 공항직원이 공항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해둔 모양이다. 다행히 그 직원의 도움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날 내 옆에 앉아 있던 일본 사람이 유나였다. 비행기로 매번 오고 갔지만 일본 여자 사람 그것도 젊은 여자 사람이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대부분 한국인 이거나 남자였다 그리고 말을 붙여 본 적이 없다. 3시간 남짓이었기에 맥주 한잔하고 자면 딱 좋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갑자기 비행기를 탑승해서 그런지 일본의 젊은 여자 분이 옆에 앉아 있었다. 일본어 공부를 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마디 서툰 일본어를 이야기를 해봤다. 그렇다고 해봐야 아주 초보적은 질문이었다. 어디 사세요? 어디 가세요? 한국을 좋아하나요? 이름이 뭔 가요? 내가 질문을 할 때마다 아주 친절하게 대답을 해줬다. 그녀는 일본의 요코스카라는 지역에 살고 있고 27살이라고 했다. 뉴욕에서 음대를 다녔다고 한다. 피아노가 전공인데 뉴욕에서 공부하다가 중단하고 지금은 요코하마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을 좋아해서 여러 번 여행을 왔고 한국의 친구도 있다고 했다. 일본어가 불편하면 영어로 이야기해도 된다고 해서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한국어를 섞어 가면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창문 너머로 인천 앞바다가 보였다. 출국 심사를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그녀가 다가왔다. 저 혹시 일본에 오면 연락 주시겠어요? 아. 네 그리고 이것 제 연락처예요. 꼭 연락 주세요.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건넸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녀가 준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고 시흥으로 향했다. 중계기를 가지러 가던 그날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아... 유나상.. 기억합니다.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을 까요? 네... 그 때 일본에서 한 번 보자고 약속을 했잖아요. 네...그랬었죠. 근데 연락이 없으셔서 전화했어요. 나는 그녀의 연락처를 어디데 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이번주에 한 번 뵐까요? 요코하마에서... 아..네. 그렇게 요코하마에서 만나기로 했다. 도쿄에서 요코하마는 기차로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가는 길에 오토바이로 유명한 가와사키라는 지명이 보였다. 요코하마역에 내리니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만난 그녀는 내 기억속의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큰 키에 순진하게 보이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는 모습이 오래전 시골에서 키우던 송아지같았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그녀는 내가 일본어에 서툴러서 한 달 동안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노트에 오늘 스케줄이라며 한국어로 써온 것을 보여주었다. 공원 산책하기 간식과 커피를 먹을 곳, 저녁메뉴와 도쿄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지 모두 적어 두었다. 요코하마역 앞에는 꽤 넓은 야마시타공원이 있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별 말없이 산책을 했다. 주변 거리를 걷다가 커피를 마시고 간식을 먹고 저녁을 먹었다. 모두 그녀가 준비해둔 순서였다. 서툰 말로 몇 마디 하고 헤어졌다. 도쿄에 돌아오니 진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화려하게 펼쳐진 높은 빌딩 숲이 나를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잠시나마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배려심은 많은 여자구나… 일본 여자들은 모두 그런 것일까? 꽤 용기를 내서 전화한 것 같은데 ..

13편 "개입"
한국에서 급한 연락이왔다. 다시 나리타 공항으로 향했다. 목동 사무실로 향했다. 급하게 부른 이유가 있었다.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는 회사에 개인 투자를 한 사람이었다. 보통 개인이 회사에 투자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경우엔 보통 지인이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경우다. 벤처기업은 사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다. 우연하게 항구에 닿으면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그 항구에 향신료라도 있으면 대박이 나겠지만 대부분의 배들은 항구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간다. 우리 회사도 그와 같다. 몇몇 투자자로 겨우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소득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이번에 중계기를 판매해서 얻은 수익 몇 천만원이 이제까지 얻은 소득의 대부분이었다. 한국에서도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은 매출이나 이익이 나지 않았다.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많았다. 관련 있는 업체와 MOU를 맺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MOU를 맺는다고 해서 매출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수익이 발생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투자를 받기위해 프레젠테이션에 MOU맺은 기업들의 이름을 올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이런 방식의 사업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가라고 했을 때 오히려 맘이 편하고 좋았다. 실질적인 매출과 이익이 있어야 한다. 기업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투자자는 한국의 통신사의 부장 출신이었다. 중계기 설치 사업을 해왔던 인물이라고 했다. 170이 안되어 보이는 키에 통통한 몸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40대 후반으로 보였다. 잠시 후 그를 사무실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저는 권부장이라고 합니다" "중계가 사업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제가 한국의 중계기 사업을 오랫동안 담당했거든요, 일본의 중계기 사업 이야기를 듣고 이건 돈이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사장하고는 이야기가 이미 끝났어요. 제가 이번에 도쿄에 직접 한 번 가보려고 합니다. 그는 만나자 마자 자기 이야기를 쏟아냈다. 사장이 일본의 중계기 사업권을 주는 것으로 투자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 중계기 설치를 잘하는 베테랑들과 함께 일본에서 중계기 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일본에서 협력하고 있는 일본 회사가 있다고 했더니 그렇게 해서 돈이 되겠냐 면서 자기들은 하루에 3곳 건당 30만원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나도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판매하는 업체가 한국업체라고 해고 설치는 일본인들이 해야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판매는 일본 법인에서 하는 것이니 문제가 없을 것이고 매장 사장들이 만나는 것은 일본의 설치업체 이니 별 거부감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대비에서 설치비용 차이가 크지만 수익을 줄여 서라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권부장은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는 사장과 이야기가 다 끝났다고 했고 사장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중단하고 사장과 사무실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했다. 목동 백화점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오고 갔다. 어느새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을에서 겨울로 변하고 있었다. 일본은 아직 가을인데... 사장은 투자를 받았으니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팀장" "그냥 좀 봐줘" "나도 급하다고" "투자를 받아야 일본에서 사업도 이어가고... 한국에서 직원들 월급도 줘야 되고... "현실이 그래 "중계기 사업은 당장 큰 수익이 나는 것도 아니고... "투자는 한 번에 돈이 들어오는데... 그걸 거부할 수 없더라 고... "어디까지나 협력이고 권부장은 일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적당히 수익 셰어 하고 그렇게 가보자고... 사장은 나에게 이런 저런 사정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미 이 정도 상황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기는 했다. 개인이 투자하기 어려운 금액을 투자했는데 아무것도 없이 투자했을 리가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어 권부장도 투자를 결심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퇴직금과 부동산을 처분했다고 했다. 그는 40대 중반의 모험을 선택한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죠. 회사를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깊이 들어왔다. 잠시 용산역에 가서 시골 고향 가는 기차를 탔다. 고향에 도착하니 한 밤중이 되었다. 개들도 잠이 들었는지 시골 동네는 조용했다. 늦은 밤 어머니는 나를 내 손을 잡더니 한 참을 잡고 계셨다. 늦은 저녁을 차려졌다. 김치와 고등어 무 조림이 전부였다. 무가 조려져서 검게 탄 부분이 보였다. 그래도 짭쪼름한 고등어에 허기가 더해 밥이 술술 넘어갔다. “너는 계속 일본에서 사는 거냐?” “모르죠... “ 아버지는 두 마디를 묻더니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곤하지... 들어가서 자라… 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왔다. 다음에 뵈요. 정류장에서 보니 길 모퉁이에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다닐 때도 어머니는 항상 그 자리에서 버스가 사라지기까지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그 시선이 때로는 부담스럽고 때로는 눈이 시렸다. 다시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14편짧은여행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유나상에게 연락을 했다.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대리는 서울 본사로 출장을 갔고 혼자 가기는 무료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요" "언제죠? "이번주 토요일요?" "제가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함께 가줄래요?" 토요일 오후 시부야 역 앞 2층 카페에서 만났다. 약소 장소는 그녀가 잡았다. 그녀는 역 건너면 바로 2층이라면서 친절하게 약도를 그림까지 그려 메일로 보내 주었다. 시부야 역을 나와서 약도를 보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창문 너머 시부야 역을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엄청난 인파가 역에서 쏟아져 나와 흩어졌다 다시 역으로 쏠려 들어갔다. 우린 커피 마시고 거리로 나왔다. 기차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보려고 하는 것은 후지가오카라는 곳이다. 거기에 일본 최초의 유기농 매장이 있다는 내용을 오래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일본에 가게 되면 가봐 야지…라고 그 책을 읽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고, 마침 이번 주말에 할 일도 없었다. "거기는 왜 가시는 거죠?" "아. 거기 역 앞에 일본 최초의 유기농 매장이 있다고 해서요" "유기농에 관심이 많은 가봐요?" "아. " "부모님이 농부시기도 하고 오래전 읽은 책에 본 기억이 나서요. "한 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동행해 줘서 고마워요." 기차는 정시에 시부야를 떠났다. 2월인데도 여름처럼 기온이 올라 겉옷을 벗어야 했다. 뉴욕에서 공부했다고 했는데 왜 돌아왔어요? 피아노를 제가 정말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해보라고 해서 하다보니 유학까지 갔는데 어느 날 피아노 치는 것이 지겹더군요. 그래서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어요. 한 번 연주를 들어 보고 싶은데요. “기회가 있겠죠”라고 하며 그녀가 맑게 웃었다.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어깨가 내 어깨에 부디 쳤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샴푸 향이 느껴졌다. 고등학교 때 만원버스를 타면 버스 안은 온갖 향기로 요동쳤다. 가끔 여자들의 진한 화장품 냄새나 샴푸 향이 나는 유독 싫었다. 일부러 여자들이 없는 버스 제일 뒤쪽에만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향기는 싫지 않았다. 정오의 햇살이 기차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눈이 감겼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곧 내려야 할 것 같아요?" 그녀가 말 소리가 꿈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기차는 시즈가오카에 정차했다. 매장은 역 바로 앞에 있었다. 가로로 길게 늘어서 매장 입구에는 꽃집이 있었다. 다음엔 빵집이 있고 그리고 유기농 매장이 있었다. 꽃집에 커다란 철로 만든 예쁜통에 프리자아가 가득 들어 있었다. 노란 프리지아 손을 흔들며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순수함을 느끼고 싶어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프리지어 꽃향기를 내게 안겨줄 그런 연인을 만나 봤으면~~~~ 프리지아를 좋아한다며 꽃집을 지날 때 이야기 하던 대학 후배가 생각났다. 사달라는 것인가? 아니면 좋아한다는 것일까?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는 군대에 갔다. 잠시 그녀에게 꽃을 선물로 줄까 하다가 말았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 "꽃향기가 좋네요" "프리지아를 좋아하나요?" "네... 꽃은 다 좋죠?" 네... 그렇군요. 나는 서둘러 꽃집을 지나쳤다. 빵집에 동네에 산책 나온듯한 사람들이 빵을 사가거나 먹고 있었다. 빵 좋아해요? 네. 한 번 먹어볼까요? 천연발효빵을 주문했다. 먹어 본 적이 없는 빵이었다. NO이스트라는 말에 끌렸다. 조금 시큼했지만 담백했다. 어떤 가요? 좀 시큼한데 맛은 좋아요. 별로 맛이 없는 표정인데 그녀는 억지로 맛있다고 하는 것 같았다. 매장에 들어가 보니 커다란 정미기가 있었다. 이게 뭐 하는 것인지 알아요? 알죠? 정미기잖아요, 일본엔 현미를 정미해 주는 매장들이 많이 있어요. 한국 매장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 일본은 많군요. 얼굴이 있는 거래... 농부의 얼굴을 보고 직거래하세요. 이런 문구가 매장 곳곳에 적혀 있고 그 아래 농부의 얼굴과 그 농부들이 생산한 농산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토마토 한 봉과 귤을 구매했다. 토마토 좋아해요... 별로요. 나는 토마토를 좋아한다. 어머니의 텃밭에는 항상 토마토가 있었다. 학교에 돌아와면 가방을 던져두고 익을 토마토를 골라 매일 먹곤했다. 그 자리에서 먹어봤다. 달큼하니 좋았다. 매장을 나왔다. 우리 산책이나 할까요? 네. 우리는 낯선 거리를 걸었다. 잠시 시내가 이어 지더니 어느 순간 작은 냇가가 나왔다. 아이들이 가재를 잡고 있었다. 가재 잡아 본 적 있어요? 당연히 없죠. 저도 사실 없어요. 우리 마을엔 가재가 살지 않거든요. 대신 물고기는 많이 잡아 봤어요? 저도 아빠 따라 낚시는 좀 해본 적이 있어요. 제가 태어나 마을에서 바다가 가깝거든요. 요코하마 어디라고 했죠? 요코스카입니다. 거기 미군부대 있는 곳이죠. 네... 거기 해변이 좋은데 언제 놀러 가지 않을래요? 그녀는 다음 약속을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다음에. 한 번 ...가보죠...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30분쯤 지나자 기차 밖으로 넓은 강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강변을 걷거나 돗자리를 깔고 놀고 있었다. 우리도 여기 잠시 내릴까요? 네... 우린 기차에서 내려 사람들이 놀고 있는 강변으로 행했다. 벌써 이른 벚꽃이 피었다 사람들이 벚꽃 아래서 놀고 있었다. 우린 그 사이를 별 말없이 걸었다. 어느덧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강은 윤슬로 반짝이고 있었다. 강은 넓고 깊어 가까이 하기에 어려웠다. 집에 가죠... 네... 그녀는 별 말없이 따라왔다. 기차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우리 저녁 먹고 헤어질까요”? 그녀가 물었지만 나는 있지도 않은 핑계를 대고 헤어졌다. 다시 니시하라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방에 누워 오늘 일을 생각해 봤다. 괜히 간 것일까? 함께 가자고 한 것이 잘못인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애써 밀어 두었다. 다음주에 강대리와 함께 권 부장 팀이 일본에 들어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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